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화상 치료도 3주 만에 마치고 건강하게 부산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며 또다시 투잡을 뛰었다. 평일에는 다이닝 카페에서 서빙 하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여전히 호텔 연회장을 나갔다. 어느덧 스물두 살이 되었고 3학년 2학기를 맞이했다. 수업을 열심히 들어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라도 고군분투를 해야만 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1학년 때는 성적이 정말 좋기도 했고 시간이 많아서 조금만 열심히 하면 4.5점 만점에 4.42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어를 다시 공부해야 하고 남들보다 배는 노력해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수업을 들으러 가기 전에는 복습은 물론 예습도 했고 회화 시간에는 어떻게든 말을 다시 익히려 노력했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가 외국어 대학교라 원어민 교수님이 계셔서 회화 수업은 원어민 교수님이 일본어로 수업을 진행했다. 물론 작문, 독해 같은 수업은 한국인 교수님이 수업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서 평일과 주말에도 쉼 없이 일을 하고 학교 수업이 있을 때는 복습도 하고 회화 연습도 충실히 한 결과 중간고사는 회화 시험도 만점을 받았고 다른 수업도 제법 성적이 잘 나왔다. 특히 교양에서 교수님이 나를 좋게 봐주신 덕에 좋은 점수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학교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하려니 몸이 지칠 대로 지쳐서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구토를 하고 설사를 반복하며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을 만큼 심하게 장염에 걸린 것이다. 일을 가야 했는데 도저히 일어날 힘이 없어서 평일 알바를 뛰는 곳에 이야기해서 그만두었다. 사실 여기 사장님이 내가 열심히 했더니 어려운 시기에 가불도 해주실 만큼 좋은 분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계속 다니고 싶었는데 정말 아쉬웠다.
그래서 수입이 반 토막이 났다. 몸이 좋지 않았고 수입이 바닥이 났는데 뜬금없이 기말고사 시즌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일을 하느라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다. 전처럼 복습을 하긴 했지만 회화는 진짜 역부족이었다.
남들은 내가 일본어를 오래 해서 정말 잘하는 줄 알지만 그건 아니다. 나는 백 퍼센트 노력형이다. 천재가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 잘해!”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야 일본어 능력시험(JLPT) N1급 자격증도 있고 일본에 친구도 있어서 대화를 많이 한 덕에 어떤 사람이 말을 걸어와도 말을 잘할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런 실력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준비를 많이 하지 않으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기본적인 건 다 알지만, 수업에서 나오는 걸 연습도 많이 하고 스스로 익혀야 말이 나오지 안 그러면 머릿속이 새햐얘진다.
그래서 기말고사 회화 시험은 교수님께 도저히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며 죄송하다는 말만 하고 기권했다. 결국 그 교수님은 중간고사 때는 만점을 주셨지만, 기말고사 때는 낮은 점수를 주셨다. 그래서 여태 받아본 적도 없는 C+를 받았다.
사실 이 학점을 보자마자 정말 따지고 싶었다. 중간고사 때 점수를 잘 주셔놓고 이제 와 학점을 이렇게 낮게 주면 어떡하냐고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교수님이었어도 중간고사 때 아무리 잘해도 기말고사 때 말도 거의 못 하고 끝나서 어처구니없는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연회장 아르바이트도 일이 없는 비수기여서 다른 일을 알아봐야 했다. 여러 일을 알아보던 차에 갑자기 내 눈에 한 아르바이트가 눈에 띄었다. 그것은 바로 화장품 쪽에서 일본어 가능자를 찾는다는 문구였다. 홀린 듯이 클릭해서 이력서를 적었다. 그런데 자기소개서를 간단하게 적으라는 문구가 있었다. 어떻게 적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생각나는 대로 적었는데 면접 보러 오라고 했다. 매니저와 간단하게 면접을 보고 조금 이따 전화가 왔다. 덜컥 합격해 버린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때부터 새로운 분야에서 도전하게 되었다. 3년 정도 요식업계에서 일을 하다 갑자기 화장품 업계로 분야를 바꾸게 된 것이 이때가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