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살 때, 방학이 되어 잠깐 집에 올라갔다. 내가 집에 하도 올라오지 않으니까 오라고 한 것도 있고 해서 몇 달만 있자 마음먹고 갔다. 그리고 또다시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다녔다. 새로 구한 일은 한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하루 12시간을 꼬박 푸드코트 안에 있어야 하고 뒤쪽이 바로 주방이다 보니 내가 상황을 봐 가면서 음식을 빨리 내어 달라고 하기도 하고 음식이 나오면 번호를 눌러서 고객들이 음식을 받아 가게끔 하는 일이었다.
사실 이 일을 한다고 하면 집에서 반대할까 봐 거짓말을 했다. 학원 다니면서 일을 몇 시간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 빚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빚 이야기는 너무 길어서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아무튼 빚을 갚아야 나도 먹고살 수 있고 부모님께 용돈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일을 해야만 했다. 서울까지 1시간 넘는 시간이 걸려 출근해 9시 반부터 8시 반까지 푸드코트에서 일하고 뒷정리까지 다 해서 9시까지 일을 했다.
내가 일하는 가게는 중국 음식을 내는 곳이다. 그래서 자장면부터 짬뽕, 깐풍기 같은 음식이 나간다. 이 일은 속도가 생명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다른 음식에 비해 빨리 나오지 않으면 클레임을 걸어온다. “왜 음식이 빨리 안 나와요?”, “도대체 언제 나와요?” 이런 말은 비일비재했다. 그러면 나는 항상 고개를 숙여야 했다. 죄송하다는 말부터 나오고 앞 주문부터 나가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만 반복해야 했다. 그런데 의외로 여기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점장님한테 혼나는 일이 잦았다.
왜냐하면 내가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대한 내 나름대로 한다고 했지만 점장님 눈에는 만족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음식이 나오는 건 아무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고, 내가 아무리 재촉한다고 해도 뒤에서 같이 일하는 조리사 사람들이 속도를 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혹은 고객들에게 잘 설명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대로 점장님 귀에 그 말이 들어가 늘 혼이 났다. 하지만 그걸 누구한테 하소연하기에는 내가 마음이 좋지도 않았을뿐더러 털어놓을 데도 마땅치 않았다. 그러니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음식에 들어가는 물을 끓이고 있었다.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냄비가 아니라 주방에서 사용하는 스테인리스 소재에 대형 냄비에 물을 끓인다. 그러다 보니 엄청 무겁다. 그래서 나는 절대 옮길 수가 없고 같이 일하는 조리사분들이 옮겨야 한다. 그런데 이날은 자기가 귀찮으니 나보고 이 물을 옮겨 담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막내이기도 했고 다른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하기에는 상황이 다들 바빠 보였다. 게다가 점장이 쉬는 날이라 항의하기도 애매했다. 그래서 눈치를 보다가 무겁지만 하는 수 없이 내가 들어서 옮겨 담는 순간 일이 벌어졌다.
너무 무거운 나머지 냄비 안에 있던 뜨거운 물이 쏟아지면서 내 몸에 물이 다 묻은 것이었다. 나는 그때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따르면 내가 비명을 질렀다고 했다. 나보고 괜찮냐고 해서 대답은 했지만 사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조리복에 뜨거운 물이 닿으면서 그게 내 몸까지 묻었다. 그때 재빨리 옷을 벗고 병원에 갔어야 했다. 그런데 같이 일하는 조리사는 전부 남자이고 나는 혼자 여자였다. 내 옷을 그 사람들이 벗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그 사람들이 내 몸 상태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부점장한테 지금 병원에 가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일 끝나고 병원을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당장 병원 안 가면 큰일 난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자꾸 일 끝나고 병원을 가라고 말하는 부점장에게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었다. 그런데 화장실에 가서 옷을 들춰보니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었다.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래서 몇 시간을 꾹 참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가겠다고 했다. 부점장이 왜 그러냐고 물어봤고 피부가 빨갛게 달아올라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왜 그걸 이제 와 이야기하냐고 하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만약에 내가 그런 상황을 목격했으면 당장 병원에 가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점장이 없는 상황에서 부점장은 내가 괜찮다고 대답하니까 괜찮은 줄 알았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병원에 바로 가라고 했을 거라면서. 그런데 부점장이 과연 일도 끝나지 않았는데 빨리 가라고 말했을까? 지금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다.
급하게 집 근처에 있는 병원 응급실에 가서 치료를 받았는데 2도 화상이라고 했다. 적어도 일을 쉬면서 3주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일을 못 한다는 이야기다. 이 사실을 가게에 알렸고 점장은 자기가 없을 때 이런 일이 벌어져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만 괜찮다면 가게에서 일하면서 병원에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노발대발하면서 난리가 났고 엄마는 점장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쉬기로 했다. 다행히 가게 측에서 내가 일하다가 화상을 입을 것을 고려해 월급의 절반과 병원 다닐 때 교통비를 지급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그만두고 치료에 전념했다.
이 일을 겪으며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내가 하지 못할 것 같으면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거절을 잘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거절을 하지 못했다. 부탁을 받으면 무조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고 나한테 부탁한 거라면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힘들면 거절해도 되고, 그걸 거절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는 건 내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그저 상대방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지 내가 그것까지 신경 써야 할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절하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테니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하는 건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