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 서대문
그간 코로나도 심했고 역대급이라는 태풍들도 여러 오는 바람에 걷는걸 잠깐 쉬었었다. 물론 동네 한바퀴를 도는 정도는 꾸준히 해왔으나 마음속에 답답함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서서히 날이 선선해지기 시작한 일주일 정도 전부터 다시 걸어볼까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 거 같다.
'걷기'는 금요일 오후가 적격이라는 생각(다음 날 쉬기 때문에..)이기에 금요일 오후에 다시 조퇴 결재를 올렸다. 그런데 결재를 받고... 퇴근할 시간이 다가오던 차에 하늘을 보니 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퇴 결재받은걸 돌릴 수는 없는 터.. 결국 우산을 쓰고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출발지인 이촌역을 나와 오늘은 서빙고 쪽 방향으로 출발했다. 사실 최종 종착지인 집이 서울 북쪽이기 때문에 이촌역에서 출발하는 루트는 크게 지난번 서울역 쪽과 서빙고 쪽 두 가지 루트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서울역이 집 쪽과 더 가깝기 때문에 그쪽으로 많이 걷는 편인데 서빙고역 쪽 루트도 가면서 볼거리가 많아 예전부터 여러 번 걷곤 했었다.
비 오는 날 걷는데는 많은 결심이 필요하다. 특히 이런 온전히 '걷기'를 위한 '걷기'를 하는 경우 그 반대의 유혹이 더 심한 편이다. '왜 비를 맞으면서까지 걷지?', '이 시간에 집에 가서 쉬는게 낫지'라는 유혹들이 상당히 많은데 일단 가기만 하면 보람찬 헬스와 마찬가지로 걷기를 시작하고 나면 그 즐거움이 바로 느껴진다.
이 날은 다행히 비가 그렇게 많이 오지 않았고 보슬보슬 내리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 반대의 유혹이 상당했다. 비까지 오는데 집에 일찍 가서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거나 마냥 쉬는게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출발하기 전까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래도 걸으며 새롭게 보이는 서울의 모습들을 보면서 그 즐거움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용산은 아직도 미군기지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한 곳이다. 미군이 소유하고 있는 용산의 알짜배기 땅들이 개방되어 많은 사람들이 애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무엇보다 걸을 때는 그런 생각이 더 드는데 이쪽 방향으로 길을 갈 때 미군기지 때문에 돌아서 간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곳이 개방되면 해방촌이나 후암동 쪽을 갈 때 이촌역에서 더 짧은 루트로 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지역 근처에 지금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대규모 아파트들을 볼 때 이렇게 제한하지 않으면 이 지역도 개발의 흐름에 못이겨 아파트들이 들어설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용산기지가 반환된다는 이야기가 예전부터 나오고 있는 거 같은데 반환이 되더라도 무분별하게 이곳이 개발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살짝 높이가 있는 이태원 언덕을 넘으면 남산이 한눈에 보이는 녹사평역이 나온다. 녹사평이라는 말 뜻이 '푸른들이 무성한 들판'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지만 지금은 당연히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녹사평역에는 큰 육교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남산을 향해 사진을 찍으면 어떻게 찍어도 사진이 잘 나온다. 이 날도 그쪽에 올라가서 찍어봤는데 맑은 날보다는 사진이 덜 잘 나온 느낌이다.
녹사평을 지나 경리단길도 한번 가보려고 했으나 이때 비가 조금 많이 와서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슥 봤지만 경리단길에 여전히 사람들이 뜸한 모습이 조금 아쉬웠다. 불과 5~6년정도 전만 해도 이 곳에 가면 뭔가 핫하고 감성이 묻어 있는 가게들이 눈에 띄었는데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인지 조용한 모습이었다. 이곳에 여러 추억이 있는 입장에서 아쉬울 따름이다.
경리단길 초목에서 지하보도를 건너면 해방촌이 나온다. 해방촌은 용산고등학교 동쪽, 남산타워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 예전에 해방되고 피난 온 사람들이 정착해 살아왔다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다. 이 동네에 참 추억도 많고 카페들과 음식점도 많이가 정겨운 곳인데 오랜만에 가보니 여전히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외국인들이 직접 운영하는 가게들이 여전히 많은 것도 눈에 띄었다.
이 날은 시간이 되면 골목식당에도 나왔다던 해방촌 신흥시장에 가보려고 했다. 방송의 힘이 참 대단한 것인지 TV에 나온 곳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항상 궁금했는데 여기를 지나는 순간 비가 많이 와 다음번에 가기로 했다. 다음번에는 꼭 가봐야지
해방촌 길을 따라 꽤나 높은 오르막을 오르고 나면 가을단풍길(소월길)이라고 불리는 남산 도로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보이는 서울뷰가 참 좋다. 날씨가 좋았으면 더 청명하고 쾌청한 풍경이 보였을 거 같은데 날씨가 흐려 조금 아쉬웠다.
이 날 또 하나의 목적지 중 하나는 영화 '최악의 하루'에서도 나오는 남산길이었다. 이 길은 영화 초반에도 나오고 엔딩 부분에도 나오는데 특히 엔딩 부분에 이 길은 주인공들의 분위기와 함께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낮과 밤이 유독 다른 느낌을 주는 장소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한번 가보려고 했는데 그 길로 올라가는 입구가 막혀있었다. 아마 '코로나 2.5단계'라 사람이 잘 모이는 장소를 막아놓은게 아닐까 싶다. 애초에 여기까지 딱 가서 사진을 찍고 '걷기'를 마무리하고자 하는 계획이었는데 그걸 못하게 되어 무척이나 아쉬웠다. 다른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이 또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비가 주르륵 계속 내리는 터라 다른 길로 돌아 내려가기로 했다.
비 오는날 '걷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맑은 날 푸른 하늘을 보며 걷는 것도 매력이 있지만 보슬보슬 내리는 비 속에 걷는 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는거 같다. 뭔가 우산을 쓰고 걸으면 나만의 세계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효과가 드는거 같기도 하고 흐릿흐릿한 풍경이 주는 분위기가 주는 평온한 기운이 마음을 안정되게 해주는 것도 있는거 같다. 옷이 축축 해지는 건 단점이지만 무더위에서 상관없게 해 주는 점도 장점이기도 하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또 비가 오는 날 '걷기'를 하게 된다면 흐린 날의 장점을 담아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보겠다. 그 날이 다시 오길 기원해 본다.
거리 : 7km
걷기와 함께 한 것들
- 탁피디의 여행수다 (팟캐스트)
계획에 없게 걷다가 보니 어느덧 서대문까지 왔다. 그런데 보니 서소문 고가에 공사 흔적이.. 서울에 고가도로가 서서히 없어지는 추세인데 여기도 없어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 고가 밑에는 기찻길도 있고해서 없애면 조금 혼잡해질 거 같은 느낌이다. 서울의 역사가 담긴 시설들이 없어지는게 좀 아쉬운데 단순 보수공사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