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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반북스 Aug 17. 2021

지금, 다신 오지 않는 순간의 기록들

[작은 친구들 6호] 박은지의 에세이

* <작은 친구들>은 동물책 소규모 서점 동반북스와 친구들이 만들어가는 정기 간행물입니다. 우리에게 영감을 준 작은 친구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의미 있고 재미 있는 것들을 생각합니다. 월1회 발행되며 4컷 만화와 크루들이 추천한 도서를 비롯해 채식레시피, 일상의 온기를 담은 에세이를 싣습니다.




나는 기록을 좋아하는 편이다. 기록해두지 않으면 언제 뭘 했는지는 고사하고 어제 뭘 먹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보니 어릴 때도 일기 쓰는 걸 좋아했고 커서는 SNS를 종류별로 하는 사람이 됐다. SNS가 인생의 낭비라는 유명한 말도 있지만, 일과를 끝내고 다이어리를 펼치지 않아도 그때그때 사진이나 영상으로 생생한 현재를 기록할 수 있다는 건 SNS의 순기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SNS를 하지 않더라도 반려동물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스마트폰 사진첩이 동물 사진으로 가득한 건 아마 다들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갑자기 ‘라떼는…’을 들먹이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어릴 때는 스마트폰이나 디지털카메라가 없었다. 나는 중학생 때 처음 우리 집에서 키웠던 강아지의 어린 시절 모습을 집에 있던 묵직한 필름 카메라로 찍었다. 24장 정도의 필름을 모두 채우면 동네 사진관에 찾아가서 인화를 맡겨야 실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했다. 게다가 기록을 좋아한다고 해서 정리의 달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필름 값이 없는 미성년자가 사진을 많이 찍을 수도 없었지만, 그나마 찍은 사진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 없어져 버렸다. 


그래도 그때의 강아지가 15년을 살았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부터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줄 수 있었다. 그래서 내 컴퓨터 하드에 남아 있는 강아지 사진은 털이 많이 푸석푸석해지고, 한쪽 눈에 하얀 녹내장의 흔적이 담긴 모습이 대부분이다. 강아지가 떠난 후 아직도 마음이 아파서 그때의 사진을 잘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진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더 어릴 때 함께한 추억을 사진으로 많이 남기지 못해 아쉽다.


지금이야 우리 집 고양이 세 마리와 리트리버 여름이의 사진을 하루에도 십수 장씩 찍는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지나간 시간은 언제나 찰나처럼 느껴지기 마련인 듯하다. 제이는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생후 4개월령의 아기 시절에 입양한 동물이라서, 당시의 사진을 보면 어쩜 이렇게 작은지 새삼스럽게 놀랍다. 손바닥만 한 아기 고양이가 소파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누워 새근새근 자고 있는 모습, 그 와중에 자기도 고양이라고 장난감에 손을 뻗으며 팔짝팔짝 뛰어다니는 모습을 더 많이 기록하고 담아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도 그렇지만 고양이의 일생 중에서 어린 시절은 정말 짧고 빠르게 지나가 버린다. 



리트리버 여름이는 태어난 지 8개월 즈음 파양되어 우리 집에 왔는데, 그때 23kg이라 이미 몸집은 다 성장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 2년 전 예전 사진을 찾아보면서 어려 보이는 얼굴과 채 자라지 않은 짧은 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여름이는 우리 집에 오고 나서도 거의 2년간 계속 차근차근 성장해온 것 같다. 그때는 여름이랑 고양이를 합사하는 데 정신이 다 팔려서 당시의 모습을 기록해둘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데, 소중한 어린 시절의 기록을 충분히 해두지 못한 것 같아 이제와서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든다. 


20년이 채 안 되는 동물의 수명에서 우리는 그들의 어린 시절부터 늙어가는 날들까지 모든 순간을 지켜보게 되는데, 그렇게 돌아보면 무심코 흘려보낸 모든 순간이 소중한 성장 기록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왜 그 순간을 살아갈 때에는 당시의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할까. 반려동물은 오늘이 지나가더라도 내일도 여전히 내 곁에 있지만, 그런 나날이 영원히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의 변화를 눈으로 느끼기는 어렵지만, 몇 날 몇 년이 훌쩍 지난 후에 돌아보면 동물들은 사람보다 훨씬 선명하게 나이가 들어간다. 



사실 사진을 넘어 영상이 보편화되면서 거의 2, 3년 전부터 새해 다짐으로 ‘유튜브 시작하기’를 결심하곤 했는데, 사진과 텍스트에 익숙하다 보니 영상을 찍거나 편집하는 마음을 먹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지금이랑 달리 코가 까맣고 털이 짧은 여름이의 예전 사진을 보면서, 지금의 기록을 어설프게라도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리트리버 여름이와 고양이 세 마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 되었지만, 사실 내 인생 전체에서 이 시간은 정말 짧게 지나가는 기간일 테니까.


거창하게 시작하려다간 영영 하지 못할 것 같아서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고 어플로 편집해서 드디어 유튜브 채널도 개설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내 반려동물이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나면 그때 지금 찍어둔 영상을 다시 보면서 추억을 회상할 수 있을까, 솔직히 그건 모르겠다. 소중한 존재가 사라진 빈자리는 추억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걸 이미 경험해봤기 때문에. 하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이런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다는 걸, 무심코 흘려보내지 않고 중간중간 붙잡아 남겨두고 싶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기적처럼 감사한 날들인지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글쓴이. 박은지

© 동반북스


<작은 친구들> 웹사이트 : http://littlepal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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