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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반북스 Sep 15. 2021

없어지면 안 되는 것이 없어졌다

[작은 친구들 7호] 박은지의 에세이

* <작은 친구들>은 동물책 소규모 서점 동반북스와 친구들이 만들어가는 매거진입니다. 우리에게 영감을 준 털복숭이 작은 친구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정기 간행물입니다. 월1회 발행되며 4컷 만화와 크루들이 추천한 도서를 비롯해 채식레시피, 일상의 온기를 담은 에세이를 싣습니다.




여름이랑 반려견 놀이터에 갔다가 철문에 손이 끼어 손가락에 피멍이 들었다. 작은 상처지만 어디에 닿을 때마다 깜짝 놀라게 아파서 밴드를 칭칭 감아두었다. 까맣게 죽은 피가 고여 있는 걸 들여다보면 어쩐지 기분이 울적해진다. 금방 나을 상처인데도 아프지 않았던 며칠 전이 그립다. 맞다, 내가 좀 엄살쟁이다. 


건강은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고 하는데, 살다 보니 절절하게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프거나, 집안의 구성원 중 누군가가 아프면 일상의 채도 자체가 싹 달라진다. 몇 년 전에 고양이 제이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고양이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나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엄살은 많지만 걱정은 금방 떨쳐내는 성격인데, 이것만큼은 매 순간 묵직한 먹구름처럼 내 일상을 짓누르는 생각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다행히 제이는 반 년이 넘는 항암치료 끝에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혹시 네 마리 동물 중 누군가 아플까봐 반려동물 적금부터 따로 들기 시작했다. 누군가 아플 때 돈 걱정이 먼저 드는 것만큼 고통스럽고 서글픈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직은 적금을 쏟아야 할 만큼 큰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비록 대형견 여름이는 1년에 한 번씩 접종만 맞아도 10만 원이라는 소비력을 자랑하지만 말이다. 


얼마 전, 여름이가 집에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 조각이 있었다. 원래는 동생 집 강아지 푸린이 것인데, 여름이가 하도 깨물어서 돈으로 보상하고 받아온 것이었다. 소형견이 쓰던 것이고 꽤 많이 닳기도 해서 크기는 검지 두 마디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았다. 여름이가 시도 때도 없이 그걸 입에 넣고 씹으면서 놀길래, 조금 더 작아지면 버릴 생각으로 내버려 두었는데 며칠 뒤 남편이 함께 잠자리에 들다가 문득 물었다.


“혹시 여름이 장난감 못 봤어?”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으로 잠시 입을 다물고 하루를 더듬었다. 남편이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는 여름이가 씹고 노는 걸 마지막으로 봤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보다 늦게 일어나는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여름이가 장난감을 씹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평소처럼 바닥에 굴러다니는 모습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잠시 조용히 상황 파악을 해보던 우리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온 집안의 불을 켰다. 이런 건 절대로 없어지면 안 된다. 넓지도 않은 집안에서 손가락만 한 물건이 없어질 곳은 여름이 뱃속밖에 없으니까! 



에어컨 뒤쪽부터 현관 구석까지 여기저기 샅샅이 뒤져봤지만 장난감 조각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름이는 그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해맑게 혓바닥을 내밀고 따라다녔다. 다행히 이상 증세는 전혀 없었다. 그래, 설마 먹은 건 아니겠지? 홈페이지에서 설명을 찾아보니 개껌처럼 씹고 노는 장난감이기 때문에 당연히 부스러기는 먹어도 무해하다지만, 그렇다고 덩어리를 꼴깍 삼켜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딱 봐도 절대로 소화가 될 수 없는 단단한 재질이기 때문이다. 


일단 장난감 수색을 포기한 우리는 다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서 오늘 하루를 복기했다. 먹는 걸 바로 발견했으면 병원에 데려가서 구토를 시켰을 텐데, 이미 늦었을까? 아직 괜찮은 것 같긴 한데 혹시 무사히 배변으로 나오진 않을까?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볼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 장난감 사이즈가 어느 정도였더라? 그게 소화가 될까, 안 될까? 이미 반쯤은 여름이가 먹었을 거라는 불길한 확신을 한 상태라 마음이 복잡했다. 나는 장폐색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서 읽고 또 읽었다. 장폐색의 원인, 크고 단단한 물체를 삼킬 경우… 어째 점점 현실이 되고 있는 것 같다. 


남편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혹시나 하는 기대로 여름이가 배변하는 걸 기다리다가 회사에 늦어버렸다. 그는 나에게 바톤 터치를 하고 출근했는데, 일어나서 거실로 나온 나는 불현듯 여름이의 수상한 행동을 발견했다. 분리수거함 아래에 앞발을 집어넣고 긁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보니 느낌이 딱 왔다. 분리수거함을 치웠더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 집 구석마다 있는 털 뭉치와 함께 여름이가 씹고 남긴 장난감 조각이 나타났다. 아니, 어젯밤에 그렇게 찾을 땐 없더니! 



여름이는 내가 장난감을 찾아주는 줄 알고 좋아했지만, 나는 우리를 밤새 마음 고생시킨 장난감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고 남편이 같은 회사 제품으로 새 장난감을 주문했다. 그래도 최악의 경우 개복수술까지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여름이가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도 구분하지 못한다고 의심한 게 조금 미안하기까지 했다. 반려동물을 키우면서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날처럼 감사한 게 있을까.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동물과 함께 살면서 이 말뜻을 뼈저리게 이해하게 되는 날들이다. 



글쓴이. 박은지

© 동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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