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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램 donggram Oct 12. 2023

기구한 팔자

가여운 내 엄마

인숙 씨는 아들을 원해 자꾸만 자식을 낳던 집안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다섯째로 남동생이 태어났지만 학창 시절에 생을 마감했다. 자식을 잃은 슬픔보다 아들을 갖겠다는 욕심이 더 컸던 걸까. 그녀의 부모는 기어이 여섯째를 가졌지만 또다시 딸이었다. 공부를 좋아했지만 마음껏 할 수 없었다. 그 시절 많은 가정이 그랬듯, 금전적인 이유로 대학을 보내줄 수 없었다고. 집에서 책이라도 보는 날에는 잔뜩 혼이 났단다. 공부가 고팠던 인숙 씨는 이불속에서 소리 없이 책장을 넘겼어야 했다.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도움으로 2년제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녀의 학구열을 채우기에는 한참 모자랐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20대 후반이 되자 부모의 등쌀에 못 이겨 결혼을 했다. 양가 집안끼리의 약속이었다. 이미 그녀의 의사는 관심 밖이었을 것이다. 지독하게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자랐던 인숙 씨는 부모를 척지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게 첫사랑을 버리고 처음 보는 남자와 3개월 만에 부부가 되었다. 둘째를 낳고서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여자가 애 낳고 바깥 일하면 집안 망신"이라는 어른들의 개소리 때문이었다. 벼랑 끝까지 몰려가며 도망쳤지만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앞까지 찾아오는 시부모 덕에 후퇴하고 말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숙 씨는 살던 집을 팔아야 했다. 남편이 도박을 했단다. 막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아이 둘을 데리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남편의 도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재산은 이 작은 집 하나 뿐. 그곳에 빨간색 네모난 딱지가 붙던 날, 인숙 씨는 이혼을 결심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귓전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소리가 있다. 누군가 울부짖는 소리. 그녀는 남편에게 "애들은 제발 내가 키우게 해 달라"며 애원했다. 그때는 그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몰랐다. 서른이 되어서야 그것이 한 여자의 발목을 자르는 결정이라는 걸 알게 됐다. 단절된 경력, 기댈 수 없는 친정, 남은 거라곤 빚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인숙 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식들이었다.


다시 돈을 벌어야 했다. 초등학생 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을 키워내야 하니까. 인숙 씨는 거실 식탁에 앉아 구인공고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 새빨간 색연필로 죽죽 그은 선들과 커다란 동그라미가 회색빛 신문을 가득 채웠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보니 늦는 날이 많았다. 몇 시에 잠이 들건, 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나 자식들의 아침을 차려주었다. 어느 날 막내 이모에게서 "너거 엄마 진짜 잠 많았었는데"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잠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인숙 씨는 잘 수 없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 돈벌이로 빼곡히 채워봐도 자식 둘을 홀로 키워내기 빠듯했을 것이다.


팔자가 기구하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인숙 씨를 보면 그 말이 떠오른다. 독단적인 부모, 실패한 결혼, 까마득하게 쌓인 빚. 열심히 살아냈을 뿐인데 불운이 켜켜이 쌓인다. 두 다리에 온 힘을 실어 버텨 보지만 세상은 그녀를 또 넘어트리고 만다. 그 꼴을 다 보고 자랐음에도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딸을 둔 인숙 씨가 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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