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그램 donggram Oct 14. 2023

코 끝의 기억

내가 기억하는 엄마 냄새

싸가지 없는 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엄마는 내 머리채를 잡았다. 날이 선 원망을 쏟아내며 나를 쥐고 흔든다. 어린 나는 어른의 마음을 토닥이는 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온갖 비난에 적셔져야 했다. 그날은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리기로 했다. 똑같이 갚아주리라. 엄마의 머리칼을 양손에 움켜쥐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녀의 몸에서 익숙한 향기가 퍼진다. 화장품과 술이 뒤엉킨 향. 내가 기억하는 엄마 냄새다.


누군가 다급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엄마의 친구다. 그녀는 서로를 물고 뜯던 우리를 겨우 떼 놓았다. 눈이 찢어질 듯 노려보며 씩씩거리는 나에게 아줌마는 한 소리 했다. "너거 엄마 술이라도 안 마시면 제정신에 살 수 있겠나?" 글쎄. 도대체 술을 안 마시고 못 살 이유가 뭔데? 있다 한들 마신다고 해결이 되는 건가. 평범한 사춘기 소녀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영역이다.


한 차례의 폭풍우가 지나간 후 엄마는 금세 잠들었다. 참 편하다. 힘들면 취하고, 멋대로 잠들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오늘도 고요해진 공기 속에 나만 덩그러니 놓였다. 거친 숨을 몰아 쉬는 그녀가 보인다. 움츠러든 어깨와 주름진 손 마디마디. 어쩐지 가슴이 쓰리다. 나에겐 엄마를 마음껏 미워할 자유조차 없다.




9년 전, 졸업과 동시에 집을 나왔다. 이렇게 살다가는 나까지 미쳐버릴 것 같아서. 이기적이지만 혼자서라도 잘 살아내고 싶었다. 나에게는 가족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태어났다는 이유로 평생을 짊어지기엔 과한 짐이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기를 쓰고 달렸다. 무릎이 깨지고 뒤꿈치가 까져도 멈출 수 없었다. 새로운 출발지에 도착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끔 길을 걷다 보면 엄마 냄새가 코 끝을 스친다. 눈 깜짝할 새 과거로 돌아가는 나를 마주한다. 시간은 모든 걸 해결해 줄 듯 기고만장해 있다가도 울부짖는 내 모습 앞에서 무력해진다. 오늘도 난 완전히 도망치지 못했다.

이전 03화 악몽은 되풀이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