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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램 donggram Oct 13. 2023

악몽은 되풀이된다

사람은 안 변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지하철을 환승해야 하는 시점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다. 엄마였다.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할까 말까 고민될 땐 하라고 했던가. 받을까 말까 고민될 땐 받지 말아야 했다. 늘어진 목소리와 어눌한 발음. "여보세요" 그 한 마디에 알코올 향이 전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것만 같다.


대뜸 내 남편에게 서운하단다. 요즘 본인에게 전화를 잘하지 않는다고. 결혼 초에나 잘 보이려고 애쓴 거라며 실망했다나 뭐라나. 애초에 그는 엄마에게 전화를 자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기를 바란 내 바람 덕이었다. 취기에 지배당한 엄마는 별거 아닌 일에 들들 볶으며 사람을 질리게 한다. 그러다 소리 내 통곡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아예 없던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하고 말이다. 달콤한 일상에 젖어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 우리 엄마는 이런 사람이었다.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는 악몽들 탓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부재중 전화가 쌓이기 시작한다. 계속되는 거절에 문자 메세지함 마저 쉴 틈이 없다. 내가 숨어버리자 엄마는 결국 내 남편의 뒷덜미를 잡는다. "장모님한테 계속 전화가 온다"는 그의 연락에 "절대 받지 마"라며 신신당부했다. 신랑은 참 말랑한 사람이다. 그 따스하고 여린 마음에 혹여 내 엄마가 생채기를 낼까 겁이 난다. 내 속을 잘 아는 그는 이런 순간에 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


며칠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엄마는 또 전화를 걸어온다. 지금쯤이라면 정신이 맑을 시간이다. 상관없다. 망설임 없이 거절 버튼을 누른다. 내가 엄마를 거절하는 데 익숙하듯, 엄마 역시 나에게 거절당하는데 익숙하다. 전화를 받건 말건 바리바리 싼 반찬들을 나에게 보낸다. 택배 상자를 열어 냉장고 정리를 시작했다. 얼핏 봐도 잠깐의 손길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양이다. 그녀가 자식에게 손 내미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얼어붙은 마음은 녹을 줄을 모른다. 엄마가 99번의 손길을 내어줘도 술 취한 목소리 한 번에 나는 악몽 속으로 돌아간다. 단단했던 일상이 으스러진다. 하루의 끝이 "사람은 안 변해"로 마무리된다. 겨우 온기가 돌기 시작한 관계가 차게 식는 건 한 순간이다. 엄마와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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