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나도 바보다. 솔직히 나도 학창 시절에 수학 공부를 안 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7-
7화. "나도 바보다. 솔직히 나도 학창 시절에 수학 공부를 안 했다."
2부.
7.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한다. 강병1동 주민센터에서 사거리 하나만 넘어가면 있는 나의 집. 정확하게는 내 명의 월세 계약 주거지. 보증금 5천만 원에 월세 55만 원. 신축인 것도 아니고. 역세권도 아니지만 내 근무지랑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집이다. 다만 6개월 뒤 계약 만료 시점이 오면, 집주인 아주머니가 분명 보증금과 월세 모두 올리겠다고 할 텐데 걱정이다. 집주인 아주머니를 상대로 강경한 협상 태도로 나가볼까. 아니다. 집주인 아주머니와의 협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재계약을 이야기 하는 자리에서 내가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강하게 나갈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도대체 어떤 집주인이길래 그러느냐. 내가 사는 집의 주인인 박 여사는 한마디로, 대장부다. 박 여사는 강병1동과 2동에 걸쳐 오피스텔을 5채나 가지고 있다. 박 여사는 어떤 사건이 발생해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태도와, 완벽한 논리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는 수완가이기도 하다. 게다가 박 여사는 중간 마진을 복덕방에 많이 주기 싫다고 공인중개사 자격증까지 취득할 만큼 똑똑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더 나아가 박 여사는 자신이 소유한 집들의 자잘한 집수리에 돈을 쓰기 싫어서 집수리에 필요한 기술을 직접 배울 만큼 성실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고로.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런 업적들이 모여 강병동의 대지주 박 여사의 별명은 '대포동 박 여사'였다. 물론 협상을 허락하지 않는 박 여사의 강경한 태도가 별명의 핵심 근거였지만 박 여사의 풍채도 별명에 일조한 걸로 알고 있다. 이 사실을 박 여사 나으리께 고한다면 그 즉시 별명 생성자는 폭행으로 인한 입원 해야 할 거다. 이런 박 여사를 상대로 내가 강경한 태도로 협상에 임한다? 아마 이계성 할머니 병원 옆자리가 내 다음 주거지가 될 거다. 협상은 포기하자.
박 여사가 보증금과 월세를 올려버리면 내가 가진 돈만으로 충당할 수 있을까. 통장 잔고를 떠올려 본다. 그러면 나의 금융자산과 가처분 소득은 0원에 수렴하게 될 거다. 내 몸 상태를 보았을 때 아마 조만간 임플란트도 해야 할 텐데. 그 돈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하다. 안 아프돈 생각은 나를 무겁게 만든다. 그렇게 심리적 초고도 비만이 된 몸을 질질 끌고 집으로 걸어간다.
겨울이라 그런지 6시를 조금 넘긴 시간인데도 어둑어둑하다. 깊은 어둠이 다가오기 전에 빨리 집으로 도망가야 한다. 어둠이 몰려오면, 이런저런 잡념들이 나를 습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몰려온 잡념에 짓눌리기 시작하면. 사는 게 무겁고 또 무서워진다. 어둠이 만든 공포를 피해 따스한 나의 보금자리로 도주해야만 한다. 영화 추격 장면을 찍듯 열심히 걸음을 옮긴다. 이제 사거리 횡단보도만 건너가면 3분 내에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거 새치기 좀 하지 맙시다!"
"새치기 아니야 이 새끼야. 알지도 못하면서."
"뭐 인마?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야 이 새끼야 대가리에 피 말랐으면 죽어. 이 무식한 새끼야."
정겹도록 천박한 싸움 소리가 들린다. 퇴근길에 지나가는 지하철역 사거리에는 로또 명당으로 알려진 상점이 있다. 로또 명당 상점 간판에는 1등 당첨자와 2등 당첨자들의 당첨 회차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기재되어 있다. 당연히 그 앞에는 로또를, 희망을, 한 주간의 망상을 사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참 바보 같은 사람들의 행렬이다. 로또 명당이라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다. 단순히 해당 매장에서 로또를 많이들 사니까 당첨자가 많이 나오는 거지, 진짜 심이 점지한 명당이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10명이 로또를 사는 곳과, 10만 명이 로또를 사는 곳 중 어느 곳이 당첨자가 더 많이 나오겠는가. 당연히 후자에서 당첨자가 훨씬 많이 나오겠지. 이 무식한 인간들이 이걸 모르는 거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수학교육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로또 명당 대기 줄로 확인한다. 바보 같고. 천박하다. 바보들의 행진을 뒤로한 채 사거리 보행신호를 기다린다. 로또 명당에서 어느 정도 멀어졌는데도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어? 아저씨. 좀 떨어져요. 안 그래도 줄도 길어서 짜증 나는데. 왜 자꾸 왔다 갔다 해요. 사람들 다 부딪히니까 좀 가만히 있어요."
뭐하는 놈인가 싶어서 뒤를 돌아본다. 내 뒤에는 십수 명이 줄을 서 있다. 아마 로또를 사려는 사람들이 착각해서 신호를 기다리던 내 뒤로 줄을 선 모양이다. 이제는 내가 줄에서 빠져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다. 보증금과 월세와 임플란트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여기가 로또 명당이던데 나도 당첨될 수 있지 않을까. 뭐랄까. 이 공간의 질서를 위해 내가 희생해서 나도 로또를 사기로 한다.
"어휴 죄송합니다. 추워서 그만!"
나도 바보다. 솔직히 나도 학창 시절에 수학 공부를 안 했다. 그리고. 뭐라고 해야 할까. 시대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게 세상에 이롭다. 게다가 내 뒤에 이미 줄도 좀 서있는데 이 사람들의 시간을 망칠 수도 없다. 돈도 좀 필요했고. 무엇보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로또가 당첨된다는 일주일 치 망각을 사고 싶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 다들 망상을 사기 위해 이 추위 속에서 줄을 서고 있겠지.
30분이나 줄을 섰을까. 로또 7장을 구매했다. 집에 가는 내내 당첨되면 무엇을 할지 상상한다. 일단 나도 근처 고급 아파트 한 채를 사고. 이계성 할머니 귓방망이도 한 대 올려붙여야지. 히힛. 성냥팔이 소녀가 장사 밑천인 성냥을 태워 심지가 다 타버릴 때까지라 망상을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현실은 어쩔 수 없다. 너무 고되고 춥다. 반면 성냥이 주는 망상은 따뜻하다.
아주 짧더라도, 가짜더라도. 현실과 달리 따스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의 망상용 성냥 심지가 다 타버려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은 역시나 춥다. 그리고 부끄럽다.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산다. 집에 도착하면 소주를 글라스에 따라 마시고 바로 잠들어야겠다. 몽롱하게 잠에 드는 그 순간만큼은 나도 성냥팔이 소녀처럼 따뜻하게 잘 수 있겠지. 그게 영원한 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