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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ngwoo Kim Mar 02. 2024

시간을 나는 드론 (6)

숭유억불에 대한 조그만 생각 (1)

귀족들의 신앙


오랫동안 한반도에 사는 민중들의 주된 종교는 토속신앙이었다. 불교는 지배계층에 의해 삼국시대 때 중국이나 인도에서 수입되었고, 적어도 고려 말기까지는 백성보다는 오히려 지배계층의 종교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백성들의 삶 곳곳에 불교가 친밀한 관계이기는 했다. 웬만한 도시에는 인근에 항상 사찰이 있었고, 사시사철 불교 관련 행사가 연이었다. 국가에서는 이런 행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고려 창업주인 왕건은 이런 불교계 행사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고구려에는 소수림왕, 신라에는 법흥왕, 백제에는 침류왕 대에 본격적으로 불교가 수입되었다. 왕실이 나서서 승려를 초청하고 사찰을 건축했으며, 불교의 행사가 국가의 행사화 되기도 했다. 왕과 귀족이 앞장서서 불교에 귀의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백성들과 호족이 그에 따르도록 했다. 일종의 top-down 방식 종교 전파인 것이다.


산지승원, 유네스코 등재


유독 한국에는 산사가 많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평지(?) 혹은 도심 근처에 위치한 사찰이 드물다. 각자의 수련과 수행을 유독 강조한 대승불교가 한반도 불교의 기반이 되었기에 그렇다는 식으로 배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국가적으로 불교를 오랜 기간 탄압한 조선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지금 남아있는 사찰의 백 배 이상의 사찰이 한반도에 존재했으며, 그 위치도 지금과 많이 다른, 도심 인근에 위치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이야 자동차로 내달리면, 사찰에서 아무리 멀어도 이삼십분 이내에 최소한 읍내에는 도달할 수 있다. 그 위치 또한 제각각이다. 영주 부석사처럼 완전 산 중턱에 위치한 사찰이 있는가 하면, 김제 금산사처럼 겹겹이 놓인 산맥을 타고 넘어야 갈 수 있는 곳도 있고, 마을과 꽤 먼 것 같으면서도 산 중턱 너른 터에 위치해 마치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은 사찰들(예: 예산 수덕사)도 있다.


자동차로 포장길을 이십여 분 운전하는 거리를 조선시대 이동한다면 얼마나 걸릴까. 말을 타는 것은 관리나 부자들만 누릴 수 있는 호사이고, 또 너른 길도 아니니 지금의 산행 정도의 속도였을 것이다. 최소 한나절은 족히 걸릴 길이다. 경우에 따라 아침 나절에 마을을 출발해도, 해가 지기 전에 겨우 도착할 정도의 거리일 수도 있다. 적어도 조선시대 사찰은, 마을과 완전히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예산 수덕사 가람배치도. 여느 사찰에 비해 유독 그 터가 넓었으며, 주차장과 인근 상가도 규모가 매우 큰 편이었다.


도심이 충분히 멀리 있고 또 사찰에서도 승려의 수행을 위해 사찰이 마을과 거리를 두게 하니 자연스레 멀어졌을 것이다. 마을과 사찰 사이 공간은 녹음이 자연스레 우거질 것이고, 사찰과 마을의 교류는 최소한의 정도를 유지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찰은 당연히 아름다운 풍광을 얻었을 것이고, 이는 현대에 와서 많은 사찰이 꽃구경, 일출 혹은 일몰이 아름다운 곳으로 이름을 날리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마치 조선시대 교육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용하고 물 좋은 곳에 위치한 서원들이, 흥선대원군 시대 서원철폐령을 때려맞고, 그 중 일부가 남아 그 본래의 의미에 더해 자연의 풍광을 담은 공간으로 변모해 현대의 관광지가 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서원철폐령


조선후기 전국에 흥행하던 서원은 흥선대원군 주도하에 집행된 서원철폐령을 맞고 급속히 무너진다. 서원은 유교국가의 지방교육기관으로, 조선의 지배계층인 신진사대부의 기반 같은 것이었다. 다만, 기백년간 지방 권세가들과 연계되어, 지방 세수의 흡입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 수가 많아지자, 결국 중앙정부로 들어가는 세수가 적어지고, 이는 왕실과 국가시스템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될 만한 수준이 되었다. 이것이 서원의 본질적인 목적과 그 의미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원철폐령이 시행된 가장 큰 배경이다. (그리고 이것은 숭유억불의 이유와 큰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초반부터 고려말기까지, 거의 천 년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불교는 국가의 정치체계이자 백성들의 삶을 근거리에서 지원하는, 국가 시스템의 일부로서 기능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국가가 섰고, 그 때까지 지배계층이었던 무신이나 권문세족, 혹은 지방의 대형 호족들과 달리, 강력한 중앙집권형 국가를 지지하는,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지배계층이 나타났다. 하지만 백성들의 삶은 왕이 바뀌든, 지배계층이 바뀌든, 큰 차이가 없다. 세금 내야할 것 내고, 지방관에 따라 수탈을 당하고, 법에 의해 관리되지만 간혹 억울한 일도 심심찮게 당하는, 그런 존재였다. 따라서, 사찰과 백성의 관계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섰다 하여 달라질 이유는 없었다. 달라질 것은 사찰과 국가, 즉 사찰과 지배계층간의 관계였다.


멸불이 아닌 억불


조선이 불교를 전반적으로 억압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서, "멸불"이 아니라 "억불"임을 주목해야 한다. 불교의 대를 끊어 완전히 지워버리고자 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세를 눌러 고려 대까지의 기세의 흐름을 끊어내고자 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왕실과 긴히 협력하고 주요한 정치세력으로 활동했으며, 백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호족을 견제하고 왕실을 지원하는 등의 국가 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했던 불교의 지위를, 유교 및 유교를 숭상하는 신진사대부와 관련 기관(예: 향교 혹은 서원)으로 이전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이 질문은, 내가 예산 수덕사를 방문했을 때 발생하였다. 입구에 있는 안내문에는, 조선시대 중종, 영조, 순조 대에 네 차례에 걸쳐 보수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불교를 찍어눌러서 없애버리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왕명에 의해 사찰을 보수했다는 것은 국가 재정을 사용했다는 의미고, 이는 숭유억불이라는 조선시대 기조와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산 수덕사 안내문. 조선시대 보수 기록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숭유억불의 기조는 신진사대부의 기조이다. 조선의 시스템은 신진사대부에 의해 설계되고 구성되었지만, 조선의 왕실은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받되 신진사대부 그 자체로 보기는 무리가 있다. 조선의 지배층이 고려대의 신진사대부, 나아가 유학자들이고, 이들의 협력을 끊임없이 구하는 것이 필요했기에, 왕실 또한 그들과 발을 맞추려 노력해왔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유학자를 왕사로 삼고 유학의 정치이념과 국가이념을 조선에 지속적으로 주입하였지만, 조선 역사 내내 왕은 관리들과 경쟁하고 정쟁했으며, 동시에 (신진사대부에 의해 설계된) 시스템에 의해 감찰받고 감시당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조선의 건국자 태조 이성계는 애초에 고려대의 신하였으며, 독실한 불자로 알려져 있다. 세종의 경우, 훈민정음의 성공적인 배포를 위해 불교의 이야기를 담은 석보상절을 편찬했다. 이후 세조는 월인석보를 편찬했고, 향후 영조와 정조시대에는 사찰의 중수가 활발했다. 게다가 남자에 비해 여자 쪽, 그러니까 왕비나 공주, 옹주, 혹은 사대부들의 부인들의 역사를 보면, 두드러지게 사찰과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기록이 꽤 많은 편이다.


신돈, 이인임, 그리고 정도전


고려의 국교는 불교였다. 고려의 전 시대 국가는 엄밀히 말하면 통일신라이고, 그 앞은 삼국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국교가 모두 불교였고, 통일신라 역시 불교였으며, 후백제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애초에 고려의 전신인 태봉 또는 마진국의 초대 왕이 승려 출신의 궁예였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불교를 믿어왔던 것을 감안하면, 고려가 불교계와 밀접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많은 무신들이 죽어나갔고, 무신정권의 염증이 점점 극대화될 무렵, 신돈이 나타났다. 등장은 개혁을 위한 장기말 역할이었다. 불교계를 등에 업었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불교계 인사였기 때문에 보다 쉽게 왕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정도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그의 손발로 향후 권문세족의 씨앗들과 신진사대부의 씨앗들을 가득 품어 사용한다. 그의 고삐를 쥔 자는 오직 공민왕이었고, 고삐를 쥐고 놓는 것 또한 신돈을 기용한 공민왕의 책임이지만, 고삐가 풀렸을 때 막장으로 나뒹군 신돈의 과오 역시 만만치는 않다.


그 신돈을 결국 몰아낸 정치세력은 권문세족이고(유학 기반의 사대부가 호족의 힘과 고려말 귀족의 힘을 더하여 권문세족으로 발전했다고 봐야 하겠지만), 또 그 권문세족(이인임 중심)을 몰아낸 것은 결국 신진사대부(이색 및 그의 제자들)이다. 공교롭게도 신돈이 사용했던 손발들이 고려 말기를 좌지우지했다고 봐도 될 것이다. 무신정권의 부패와 그들에 대한 혐오가 정치판을 바꾼 것이지만, 겉으로는 신돈의 등장과 그의 망령이 고려 말기를 휘감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몽주와 정도전을 선두로 하는 신진사대부는, 권문세족과 불교계 모두를 혐오했다. 정확히는, 유학의 근본 정신 중 하나인 민본을 해치는, 국가의 이를 개인의 이로 사용하는 세력들을 혐오했던 것이고, 신돈을 위시한 당시 불교계의 이미지가 권문세족이나 부패한 무신정권 딱 그 정도의 느낌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전국 각지에 위치한 사찰들은 자발적인 시주 이외에, 마치 면죄부 팔던 중세 카톨릭 교회 느낌으로, 각종 법회 등등 해서 돈을 뜯어가는 상황도 발생했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에도 제대로 된 불자들이 있었겠지만, 사람 눈에는 그렇지 못한 것이 제일 먼저 들어오니까 말이다.


권문세족에 대한 혐오와 불교계에 대한 혐오, 이 두 가지가 조선 초기, 특히 태종대에 들어와서 정책으로 형성되어 시행되기 시작한다. 건국주 태조 이성계는 애초에 무인이었고, 고려대의 신하였으며, 당연히 불교에 대한 신심이 깊었을 것이다. 불교계의 전횡은 혐오해도, 불교는 아예 그들의 삶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2대 정종 역시 신진사대부는 아니었다. 이성계의 휘하 장수로 활약했고, 같은 정치관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약간 바지사장의 느낌이었기에, 뭔가 다른 걸 시도하기에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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