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모함이 쾌속정처럼 움직일 수 있을까? 거대기업이 벤처기업처럼 민첩해질 수 있을까? 스티븐 데닝은 ‘애자일, 민첩하고 유연한 조직의 비밀’(2019)에서 ‘작은 팀’, ‘고객’, ‘네트워크’라는 3가지 법칙을 소개하고 있다. 거대한 조직도 민첩하게(‘애자일, agile’) 움직일 수 있는데, 10명에서 15명의 소규모 팀을 만들고, 업무를 작게 나누고, 고객을 참여시키고,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수시로 상호작용하도록 만들면 가능해진다.
세계 40여 나라에 10만여 임직원을 거느린, 330년 역사의 영국 바클레이(Barclays)은행은 2015년부터 15인 이하의 애자일 팀을 1000개 이상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온라인 대출, 온라인 신규 회원 유치 등의 첨단 서비스를 빠르게 도입할 수 있었다.
10만여 직원을 거느린 140년 전통의 스웨덴 통신회사 에릭슨도 3주 단위로 작업하는 작은 팀 100개를 운영함으로써 네트워크 사업부의 고객들에게 더 많은 가치를 더 빨리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매출 130조 원(2018년 기준)에 직원은 14만여 명에 달하는 미국 IT기업의 선두주자 마이크로소프트는 2011년부터 애자일 기법을 도입했다. 개발본부에 속한 4천여 명의 직원들을 10~12인의 작은 팀 350여개로 나눴고,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고객에 집중했다. 개발 업무를 잘게 쪼개서 3주 단위로 피드백 했다. MS는 겉보기에는 거대한 항공모함 같은 회사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쾌속정들로 구성되어 있다.
관료주의 조직과 애자일 조직은 어떻게 다른가? 관료주의 조직은 하향식이고, 내부에 집중하고, 상호작용이 빈약하다. 고정된 사고방식에 갇혀 있고, 기존 이익을 방어하고, 주주이익 창출에 몰두한다. 반면, 애자일 조직은 자율적이고, 외부(고객)에 집중하고, 상호작용이 풍부하다. 성장형 사고방식을 하고,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고, 고객가치의 창출과 전달에 몰두한다(스티븐 데닝(2019) 참조).
위에서 소개된 바클레이, 에릭슨, MS 이외에도 명문 장수기업은 ‘애자일 조직’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백년기업의 변신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의 일이다. 1999년 10월 핀란드 헬싱키를 난생 처음 방문했다. 파리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1시간 이상 연착했다. 마중나온 노키아 직원에게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라고 했다. 답변은 예상과 달리, “기다리지 않았는데...”였다. 회사 컴퓨터로 공항의 인터넷 서비스를 확인하고, 연착 시간을 감안하여 왔다는 것이다.
노키아는 1865년에 설립된 묵은 회사였고, 창업 초기에는 제지와 펄프가 주력이었다. 점차 고무, 타이어, 통신케이블, TV, 가전, 통신장비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그러나 1992년 CEO에 취임한 요르마 올릴라는 휴대폰과 통신장비 중심으로, 고부가가치 사업 중심으로 간소화했다. 1999년부터 2011년까지 노키아는 세계에서 휴대폰을 가장 많이 팔았다. 모토롤라를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섰다.
2019년 여름 헬싱키를 다시 방문했다. 2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고, 도시는 쾌적했고, 바다는 깨끗했다. 그러나 노키아는 과거의 노키아가 아니었다. 1999년부터 12년간 지속된 휴대폰의 성공에 취해서 노키아는 애플의 아이폰을 간과했고, 결과는 참혹했다. 2013년 9월 노키아는 휴대폰 사업을 54억 유로(약8조원)에 마이크로소프트(MS)에 매각했다. 네트워크 장비와 솔루션, 사물인터넷(IoT) 센서, 위치정보 서비스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했다. 백년기업이 벤처기업처럼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노키아 사람들은 2013년 전후의 구조조정 시기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넉넉한 실업급여를 2년가량 받으면서 새로운 회사로 전직하거나 벤처기업을 창업했다. ‘앵그리 버드’도 그런 벤처기업 중에서 나왔다. 핀란드 경제의 20% 안팎을 책임졌던 노키아의 씨앗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경제 전반으로 퍼져 나가서 꽃을 피우고 있다. 핀란드의 허리는 더 튼튼해졌다.
에디슨이 세웠던 미국의 GE는 120년이 넘은 거대한 공룡 같은 기업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디지털 혁신에 있어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산업인터넷과 디지털, 소프트웨어에 전사적 역량을 쏟아 붓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작동하고 있는 GE의 제품을 사물인터넷과 GPS, 클라우드로 연결하고, 원격으로 모니터링하고 진단한다. 이런 분석에 기초하여 고장을 미리 예측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산업인터넷 플랫폼 ‘프리딕스’(Predix)를 출시한 바 있다. 미국의 GE와 독일의 지멘스는 둘 다 백년기업이지만,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산업인터넷의 표준을 선도하기 위해 벤처기업처럼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GE와 지멘스의 ‘디지털 혁신’은 앞의 글 참조).
일본의 코마츠(KOMATSU)제작소도 백년기업이다. 이 회사는 1917년 1월 이시카와현의 코마츠(小松)라는 소도시(인구 10만 명)에서 출범했다. 설립 당시에는 구리광산의 채굴용 기계를 만들던 회사였지만, 지금은 건설기계 분야에서 일본 1위, 세계 2위의 업체로 성장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미지의 바다에 가장 먼저 뛰어드는 코마츠의 강력한 무기는 ‘콤트랙스’(KOMTRAX)다. 콤트랙스는 코마츠가 판매한 건설기계의 원격 추적 시스템으로서, 건설기계의 중요 부품에 장착된 센서와 GPS, 통신시스템을 통해 건설기계의 작동 상태를 원격으로 측정하고 진단함은 물론 고장을 미리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유지보수를 가능하게 해준다. 코마츠는 1884년에 설립된 ‘조이 글로벌’이라는 미국의 광산기계업체를 2016년 29억 달러(약3.3조원)에 인수했다. 체격을 키움과 동시에 체질도 혁신하고 있다. 고부가가치 제품의 개발, 예측(Predictive) 서비스 등으로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고 있다.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AI(인공지능), 로봇 등을 활용하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삼성은 올해가 창립 82주년이었다. 1938년 척박했던 일제 식민지시대에 씨앗을 뿌려, 유통과 무역, 제당, 모직, 합섬, 보험, 가전, 화학, 컴퓨터, 통신, 반도체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그 중에서도 1983년에 시작했던 반도체 사업이 신의 한수였다. 나라 안팎에서 말렸던 반도체 사업이었지만 73세의 이병철 회장은 인생을 건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다. 그 승부수가 삼성과 한국경제를 살렸다.
1996년에 미국 뉴욕으로 출장을 갔을 때 시내 번화가의 백화점에서 삼성의 가전제품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20여 년 전 우물 안 개구리 같았던 삼성전자가 지금은 세계 최고의 기업 중 하나로 성장했다. 전 세계가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2020년 3분기 삼성전자의 실적은 연결기준으로 매출액 66조 원, 영업이익 12.3조 원이다. 전년 동기대비 크게 증가했다. 중국은 최근 ‘반도체 굴기’를 내세우며 삼성을 빠르게 쫓아오고 있다. 한국 메모리 반도체의 미래가 도전받고 있다. 삼성은 비메모리 반도체, 시스템 반도체, 바이오 등의 분야에 새롭게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