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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첫사랑 13화

불안한 아침, 안심한 저녁

남겨질 사람들을 위한 작은 의식

by 레옹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해장국 앞에 앉아 둘리는 숟가락만 빙빙 굴리고 있었다.


"오늘 학교 안 가면 안 될까?"


조심스레 흘러나온 둘리의 목소리에 건터는 짧게 숨을 고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둘리의 손이 멈췄다. 숟가락을 쥔 손끝이 작게 떨렸다.

건터는 그런 둘리를 없이 지그시 바라보았다.

둘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마지못해 국물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국물이 목을 넘어가는 순간 작지 않은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남김없이 다 먹어 그래야 술냄새 안 난다."


옆에서 눈칫밥을 먹던 하니가 입을 가리며 '풉'하고 존재감을 알린다.

해장국집 문을 나서자 후끈한 아침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둘리는 어깨가 축 쳐진 채로 하니를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하니는 그런 둘리의 등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둘리의 방향을 잡아준다.

둘은 느릿하게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얼마나 갔을까 둘리는 뒤를 돌아 건터쪽을 쳐다본다 하니와 함께...

손을 뻗어 잡아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스스로 걷게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어서가~ 더워진다."


양팔을 뻗어 어서 가라는 시늉을 연신 해댔다 속 마음과 달리...

하니가 다시 한번 둘리의 등을 쓸어 가만히 다독였고 둘리는 한쪽손을 들어 아쉬운 마음을 보낸다.

건터는 그제야 숨을 한 번 내쉬고 천천히 돌아섰다.



오후에 건터는 시장 입구 은행 간판 아래에 서 있는 하늘색 공중전화 부스를 찾았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 사람과 사람이 뒤섞인 시장 입구 부스 안에는 깨진 유리창 사이로 더운 바람이 스며들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거칠게 전화기에 밀어 넣었다.

~~~

신호음이 길게 울렸다.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터는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건터입니다.

둘리는 학교 잘 갔어요.

조금 힘들어하지만 잘 견디고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 가볍고 조심스러운 안도의 숨소리가 들렸다.

건터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용히 물었다.


"... 동생은요? 가출했다고 들었는데요. 둘리가 동요하고 있어요."


짧은 정적이 흐르고 곧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소재는 확인했어. 곧 데리러 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가슴 깊이 숨을 내쉬었다.


"~ 알겠습니다."


"건터야 고마워."


~ 짧은 신호음이 들리고 전화가 끊겼다.

건터는 수화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북적이는 시장 골목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아무 일 없다는 듯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부스 옆에 잠시 기대어 담배를 꺼내 문다. 둘리의 아침 뒷모습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어린 줄 알았는데 다 커버렸네.'


저녁 무렵,
작은 골목은 붉은색 태양의 조명이 켜지고 퇴근하는 사람들과 하교하는 학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아직 완전히 식지 않은 바람과 가게 안을 가득 메운 치킨 냄새가 섞여 낡은 선풍기 바람을 타고 흘렀다.
건터와 K는 치킨집구석에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작은 TV에서는 프로야구 하이라이트가 흐르고 있었고 사장은 화면을 보면서도 이따금 이쪽을 힐끔거렸다.

'드륵~' 문이 열리고 둘리와 하니가 들어섰다.
조금 늦게 P도 숨을 헐떡이며 가게로 들어왔다.

동생들 이마에 맺힌 땀을 보며 선풍기 방향을 재조정하면서 음료와 맥주를 추가로 시켰다.
건터는 잔을 내려놓으며 K를 불렀다.

"K야 아까 말한 거 있지? 지금 가서 사 와."

K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치킨집을 나섰다.

남은 네 사람 사이로 조용한 공기가 흘렀다.
건터는 둘리와 하니 그리고 P를 차례로 바라보다가, 살짝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갑작스러운 제안이긴 한데,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너희들한테 할 얘기가 있어."

건터는 목이 타는 듯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 뒤 세 사람을 차례대로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P의 얼굴을 진지한 눈빛으로 주시하며)


"나~ 너랑 의형제 맺고 싶다."


둘리와 하니는 놀란 얼굴로 "의형제?" 하며 서로를 바라봤고,

P는 주저 없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좋아요 형!

저도 형처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어요."


의형제는 피의 맹세를 해야 하지만 포도주로 대신할 거라고 건터는 덧붙였다.


"피의 맹세?" 서로를 쳐다보며 놀라는 둘리와 하니!


진짜 피를 보는 건 영화에서 만들어낸 거라 얘기하면서 멋쩍게 웃어 보인다.

그 말에 P는 장난처럼 진짜 피도 괜찮다며 함께 따라 웃었다.

그때 하니가 큰소리로 건터와 P를 번갈아보며 묻는다.


"그럼 둘리도 같이 하면 되겠다~요.

셋이서 의남매 맺으면 되잖아요. 아~ 낭만적이다."


건터와 P는 동시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돼!"

둘리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고 하니는 어이없어하면서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네 사람은 한바탕 웃음으로 늦여름의 더위를 쫓았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고 K가 포도주와 양주를 들고 돌아왔다.

건터는 새 유리잔을 건네받아 테이블 위에 올린 후 조심스레 포도주를 따르며 말했다.

"증인은 셋!
둘리와 하니 그리고 K."

P와 건터는 서로를 바라보며 잔을 들었다.
짧지만 진심을 담은 맹세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포도주로 대신한다!
우린 의형제다!
서로를 끝까지 믿고 의지한다!"


둘은 잔을 맞부딪치고 한 모금에 포도주를 마셨다.
그리고 둘은 양손을 맞잡았다. 둘의 기운이 서로의 심장으로 전해졌다.

둘리와 하니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K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초저녁의 치킨집 낡은 테이블 위

서툴지만 진심이 가득한 의식이 그렇게 끝이 났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며 건터는 어젯밤 해프닝에 대해 P와 이야기했다.

P는 둘리의 최근 집안 사정에 대해 건터보다 더 많이 인지하고 있었다.

둘리 이모의 딸이 P의 막냇동생과 같은 반이란다.


'아~ 그렇구나' 서로에게 메신저가 있었던 것이다.


본인만 둘리의 사정을 잘 모르고 있던 것 같아 마음이 좀 복잡했다.

건터는 이제 며칠후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

주머니가 가벼운 사회 초년생이 첫사랑 옆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생각처럼 녹녹지 않았다.
해는 완전히 저물어 별들의 시간이 이어지고, 어둑해진 골목 끝에선 술집 네온사인과 취객들의 소리가 둘리의 귀가시간임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고 도둑고양이 담 넘는 그림자가 보인다.
하늘에는 별 하나 둘셋넷다섯... 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날 밤 헤어지는 순간은 여느 때완 달랐다.

그 밤 건터와 P, 서로의 마음속에는 작은 약속 하나가 따뜻하게 남아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둘리 돌보기》 같은 무언의 약속...

엄마랑 통화한 후 조금 더 안정을 되찾은듯한 둘리와, 조만간 건터가 떠난다는 말에 둘리만큼 아쉬움을 드러내는 하니, 알 수 없는 미소로 속내를 감추는 K.

모두들 각자의 마음을 품은 채 아쉬운 이별을 한다.

건터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생각한다.

'둘리와 P 둘이 연인이 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자
건터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별이 깔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조금은 쓸쓸했지만, 마음 한편은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하고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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