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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첫사랑 14화

헤어짐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만남의 약속이다

리처드 바크 (Richard Bach)

by 레옹


건터는 이제 둘리의 곁을 떠나야 할 때가 왔다.

며칠 전, K는 먼저 떠났고, K로 인해 건터는 체류비 걱정을 덜고 비교적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K와의 불편했던 동거는, 끝내 건터의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을 남겼다.


떠나기 전날 밤, 건터는 둘리, 하니, 그리고 P와 마지막 저녁을 함께 보냈다.


“오빠? 우리 오늘 밤샐까?”

둘리가 철없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니와 P는 마치 한 몸처럼 동시에 건터의 눈치를 살폈다.


“안돼! 둘리. 너 저번에 엄마랑 약속한 거 잊었니?”

건터는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그날 이후, 둘리는 가출 소동 끝에 건터의 숙소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음 날 엄마와 통화하며 “다시는 이모 걱정 끼치지 않겠다”라고 철석같이 약속했던 터였다.

건터 역시 그 통화에서 둘리의 안전을 부탁받았고, P가 곁에 있는 상황에서 더욱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야 했다.


“형이 간다니까 많이 아쉬워요. 이제 진짜 정도 들고, 형제의식도 치렀는데…”

P의 눈빛이 젖어들었다.


“P야. 이젠 네가 둘리를 잘 지켜줘야 해.

네가 없었으면 나, 이렇게 떠나지 못했을 거야.

형은 너 믿고 간다. 마음 놓고.”


“건터 오빠, 그동안 정말 정들었는데... 요. 이렇게 헤어지려니까… 흑…”

하니가 건네는 말에 둘리의 눈가가 붉어졌다.


"어? 너희들 우는 거야? 오빠가 웃긴다?"

건터는 웃기지도 못할 거면서 서툴게 동생들을 다독인다.


“야! 너희들 이제 뚝. 이러다 진짜 형이 우리 웃기겠다?”

결국 P가 웃으며 분위기를 정리한다.


건터는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론 울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건터가 무작정 둘리를 찾아간 건 단순한 감정만은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눈앞에 서면, 둘리가 자신을 이성으로 봐줄 것이라 믿었으니까.


하지만 둘리는 어린아이는 아니다.

정신연령은 19살 정도로 충분히 스스로를 돌볼 줄 안다.

이성 교제에 관심이 없을 리도 없다.


원하지 않던 지역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이모 집에서 통학하게 된 둘리는, 겉으론 밝아도 마음속에는 외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 틈을 건터는 기대했던 것일까?


P는 멋진 친구다.

처음 만났을 때는 한밤중 건터의 방에 침입해 목에 칼을 들이댔을 만큼(물론 P가 칼을 들이대지 않았다) 겁 없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P는 건터의 당당함에서 뭔가 진심을 읽었다.


‘아, 이 사람… 진짜 둘리를 사랑하는구나.’


만약 그때 건터가 비굴했다면, P는 단칼에 그를 망신 줘 동네에서 쫓아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는 사내끼리 알아봤고, 진심을 공유하며 의형제를 맺었다.


P는 둘리에게 건터 못지않은 애정을 보여줬고, 그런 마음은 둘리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좋아한다고 달려드는 여학생들이 줄을 선다지만, P는 둘리 앞에서만큼은 진지했다.

그런 P와 건터는, 각자의 방식으로 둘리를 좋아했다.


둘리는 둘 아니어도, 관심받는 아이였지만

그 곁에 듬직한 두 남자가 있다는 건 분명 복이었다.


이제, 고향 오빠인 건터는 군 입대를 준비하기 위해 떠난다.

물론 둘리는 '오빠가 남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건 둘리의 마음속 깊은 말일뿐이다.


하니는 둘리의 단짝이지만, 사실은 P를 좋아하고 있다.

겉으로는 조심스레 감정을 감추지만, 조금만 가까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하니는 P를 볼 때마다 얼굴빛이 달라지고,

그런 하니의 마음을 모르는 건, 어쩌면 P 뿐일지도 모른다.


다음 날 둘리와 하니, P의 배웅을 받으며 건터는 그 고장을 떠난다.

한 여름 땡볕에 무작정 둘리를 찾아간 지 40여 일이 그렇게 아쉬움의 시간으로 그들의 곁을 스쳤다.

떠나는 버스 안, 밖에서 양손을 휘젓는 저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건터는 가을걷이가 시작된 황금들판을 바라보며 mymy의 이어폰을 양 귀에 꽂았다.

둘리가 직접 연주해서 선물한 카세트에선 '영웅본색 2 OST'가 흘러나왔다.


https://youtu.be/iRlSr585VMc?si=tlPiZVx7w0Qeh4QB

채널.라떼La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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