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건터오빠~ 둘리가.. 둘리가..”
"하니야? 무슨 일인데? 숨 돌리고 찬찬히 얘기해 봐"
하니는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하니가 말했다
"오빠! 둘리가 왔는데 술을 잔뜩 마셨어 빨리 가봐야 해~ 빨리 ~"
곧장 따라나선 골목길, 하니의 집 앞 골목 한 귀퉁이에 그녀가 보인다
양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힘없이 앉아있는 둘리!
그 앞으로 빠르게 달려가 쪼그려 마주 앉았다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얼굴을 들어 올리며 둘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었고 눈가는 젖어 있다
내려온 앞머리를 귀 뒤로 쓸어 올렸다
K가 사 온 생수병을 따 둘리의 손에 쥐어 주었다
"둘리야~ 오빠야! 이거부터 마셔~"
다시 축 쳐지는 얼굴을 다시 양손으로 잡았다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하니는 둘리의 가방을 뒤척이더니 티슈를 꺼내 둘리의 눈물을 닦아준다
덩달아 눈가가 벌게진 하니!
"둘리야~ 무슨 일이야~"
결국 울음보가 터지는 둘리와 하니!
"안 되겠다 K야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어? 어.."
나는 K와 둘리를 일으키고 양쪽에서 부축했다
170센티가 넘는, 술 취한 여고생은 생각처럼 가볍지 않았다
하니는 둘리의 가방을 챙겨 우리 뒤를 따랐다
일단 시장 어귀에 있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일요일 저녁이라 다행히 한가한 가게 안, 편안한 소파가 있는 구석자리에 둘리를 앉혔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마자 둘리는 울기 시작했다
하니는 어쩔 줄 몰라하며 둘리의 팔을 연신 쓸어내렸고, K는 말없이 애꾿은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하니가 나직이 말했다
“건터오빠! P한테도 연락해 볼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일 P가 오면 그때 얘기해도 늦지 않아”
"네에.."
"일단 음료 좀 시키자 둘리는 울고 싶을 때까지 좀 울고.."
그렇게 우리 셋은 울고 있는 둘리에게 마음속 시선을 고정한 채 침묵의 시간을 보냈다
둘리는 그렇게 말없이 한참을 울다가 어느 순간 울음을 그쳤다
나는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한데 잠시만… 둘리랑 단둘이 좀 있을게”
조용해진 가게 구석에서 둘리는 낮게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SH… 내 동생… 배다른 동생이래 그걸 최근에야 알았어”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아빠는 계속 외박 중이고, 엄마는 결국 이혼 준비 중이래 어제오늘 일이 아녔던 거야 그래서 날 이모네로 보낸 거고… 근데 동생은 그게 더 싫었던 거 같아 결국 가출했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나도… 도망치고 싶었어 그래서 슈퍼에서 소주 사서 마시면서 하니네까지 걸어왔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았어 집만 아니면…”
나는 그녀의 말을 조용히 다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배다른 동생이면 어때 그렇다고 너까지 가출하는 건 옳지 않아"
나는 밖에서 기다리던 K와 하니를 다시 안으로 불렀다
하니는 둘리 옆으로 가 둘리를 안으며 등을 토닥인다
나는 K에게 귓속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장골목 귀퉁이에 있는 공중전화로 향했다
동전 몇 개를 손에 쥐고 번호를 눌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벨 소리가 몇 번 울리고 나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건터예요~”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녀가 말했다.
“… 그래, 건터야”
나는 둘리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가출은 아니지만, 현실을 피하고 싶어 술을 마신 거라고
걱정 마시라고, 곁에 내가 있겠다고
나도 노력해 보겠지만 어머님도 둘리의 입장에서 생각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냥… 이 밤만 잘 지나가게 하고 싶어요”
둘리 엄마는 한참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널 믿는다 부탁할게, 건터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전해지던 그녀의 숨소리가 잠시 후 사라졌다.
전화를 끊고 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깊~게 마셨다 깊~게 내쉬었다
커피숍으로 돌아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있는 둘리를 보고 나니 나도 마음이 좀 놓였다
술냄새가 심해서 아무래도 하니네 집으로 가서 자기에는 좀 어렵겠다란 결론이 났다
K에게 먼저 가서 방을 하나 예약하라고 보낸 후 둘리에게 하니네서 잔다고 이모님께 전화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니와 둘리는 커피숍 전화를 빌려 이모에게 전화를 해서 안심을 시키고 나니 둘리가
"오빠!"
"응?"
"나 오늘 취하고 싶어"
"그래? 괜찮겠어?"
"오늘 처음 마신 건데 아까는 깡소주를 먹어서 그런 거 같아 ㅠㅠ"
"그럼 소주는 안될 것 같고 맥주를 마시자"
우린 커피숍을 나와 단골 경양식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녁을 먹지 않은 둘리를 위해 요기가 될만한 안주를 시키고 맥주도 함께 시켰다
"나도 한 잔만 마시면 안 될까요?" 하니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묻는다
"넌 이따 집에 가야잖아 괜찮겠어? 너희 부모님 몽둥이 들고 찾아오는 거 아냐?"
"맥주는 마실 수 있어.. 요"
"그래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면 좀 그렇지 "
숙소에 다녀온 K가 합석하고, 나는 늦은 저녁 겸 고등학생 여동생들에게 술 먹이는 오빠를 자처했다
"오빠가 여기온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벌써 그렇게 된 거야" 둘리와 하니가 동시에 묻는다
"그래~ 이곳에 살기는 어려울 것 같고 오빠도 갈 데가 있으니 이제 동네를 떠나야 할 것 같아"
"아~ 정들만하니까 이별이네 너무 아쉽다" 입안의 돈가스를 오물거리며 하니가 아쉬움을 토한다
"하니야 부탁 하나만 하자!"
"오빠가 내게 뭔 부탁을?"
"둘리 좀, 네가 잘 어르고 달래고, 여고시절 좀 잘 보내게 응?"
"아~ 그런 거라면 무슨 부탁까지 ㅎㅎ"
"둘리도 오빠가 오늘 이만치 너 해달라는 데로 다 해주니까 다른 생각 말고 엉?"
하루아침에 스무 살 꼰대가 된 건터다
어느덧 시간이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 아침 일찍 시장 해장국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하니는 집으로 달려갔다(그래 달려라 하니!)
둘리와 숙소로 들어왔다
새로 얻어놓은 방으로 가자니까 굳이 내가 묵는 방으로 간단다
'고집 있네 아기공룡 풉'
K는 새로 얻은 방으로 들어가고 나와 둘리는 내가 묵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양치하고 화장실 다녀와~ 방 청소 해 놓을게"
조금만 있다가 간다고 버티다 이불속으로 파고드는 둘리는 숙취와 긴장이 풀리는지 바로 꿈속으로 빠져든다
새근새근 잠이든 둘리를 쳐다본다
그런 일이 있음 진작 내게 말을 하지 혼자서 끙끙대고 있었니 그래 원치 않던 타지생활이 편할 리가 없지
쪼그맣던 아기공룡이 이렇게나 컸네 풋...
방안에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물었다
이제 슬슬 떠나야 하는데 둘리 상황이 이러니 맘이 편치 않았다
K는 이미 다른 방으로 들어갔고, 둘리의 잠자리를 확인하려 방으로 돌아갔다
방 안에는 둘리와 나, 단 둘만 있다
그러고 보니 둘리의 잠든 모습은 처음이다
낮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린다
가끔 몸을 들썩이지만 숙취 때문인지 잠자리가 민감하진 않은 모양이다
여름이긴 하지만 얇은 이불을 가슴 언저리까지 살포시 덮어준다 내 사랑 여름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을 자선 안 됐다
살며시 손을 뻗어 방 한구석에 놓인 mymy를 끌어당겼다
어김없이 둘리가 선물한 연주곡 테이프를 틀었다
볼륨을 낮춘다고 했지만 너의 음악은 너무도 크고 강렬하게 내 심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작은 스피커에선 영화 'Love Story'의'Where I Do Begin'이 흘러나왔다
우리가 겨울에 만나서 그럴까
네 연주곡엔 겨울을 담은 곡이 많구나...
https://youtu.be/sd50Qk-oSCU? si=7 e846 yFBjk_KSkpx
눈을 감았다
까만 방안엔 너의 숨소리와 너의 음악과 나의 음악만이 흐르고 있었다
몇 곡의 연주곡이 지나고 있을 때 침묵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나 화장실"
"응~ 우리 둘리 깼구나"
음악소리에 묻혀 벽에 기대앉은 채 꿈을 꿨나 보다
"오빠 같이 가 무서워"
"응.. 그래 오빠가 같이 가줄게"
"나 칫솔하고 수건"
"응~ 오빠도 양치해야 해"
그렇게 낯선 장소에 함께 다녀왔다
“오빠 옆에 있어줘…”
"응~ 그래 어서 자 낼 학교 가야지"
"오빠..."
"..."
"나.. 나 좀 안아줘.."
나는 조용히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어깨가 떨렸고, 맞닿은 가슴은 서로의 심장소리로 적막이 깨질 듯하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왜 오빠한테 말을 안 해?"
조용히 나무라며 어색함을 쫒으려 했다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원한다면… 가져도 돼 나.. 괜찮아”
나는 턱까지 올라오는 숨을 참으며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서로의 심장은 고속주행하는 자동차의 엔진처럼 터질듯 박동했다
“널 사랑해~ 그래서, 지금은 널 가질 수 없어”
“왜? 사랑한다면서.. ”
"약속했어 네가 18살이 되면 얘기해 줄게"
"무슨 약속? 나도 알건 다 알아 어린애가 아니라고"
"알아~ 그래도 오늘은 아냐"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고 "어서 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해 누가 보면 어쩌니?"
"그럼 키스해 줘"
그녀의 입술에 살포시 입 맞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담배 피우러 갔다 올 테니까 어서 자~"
밖으로 나와 또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휴우~~
마냥 어리게만 봤던 둘리는 어느새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난 나 자신이랑 약속했단 말이다 너 주민증 나오면 정식으로 교제신청하겠다고...
밤새 그녀의 곁을 지켰다
어떤 손끝도 욕망의 선을 넘지 않았고, 오직 너를 아끼는 마음으로만 버텼다
새벽 2시
둘리는 깊게 잠들어 있었다
나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그 밤을 넘기고 있었다
오전 7시
늦여름의 아침햇살이 골목사이를 비추고, 시장은 분주하게 깨어나고 있었다
나는 둘리를 데리고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하니도 왔다
뜨거운 국물에 얼굴을 대고, 말없이 밥을 떠먹던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 학교 안 가면 안 될까?”
나는 고개를 좌우로 한 번 흔들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