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느낌 첨이야
중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부터 봄방학이 끝날 때까지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터미널 아래동네 배달순번 세 번째인 그 집은 갈빗집이었는데 야트막한 산아래 널따란 집이었다
마당 한 구석엔 아기자기한 정원이 꾸며져 있고 승용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담장이나 출입문이 따로 없는 오픈된 구조였는데 도롯가 쪽으로 난 커다란 창은 항상 불이 밝혀져 있었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간간히 방안 화장대 앞에 앉아 머리를 만지거나 거울을 보는듯한 여인의 실루엣을 보게 되면서 호기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호기심은 배달의 루틴이 변경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계단 위에 신문을 던져두고 그 집 앞 개천 건너편 공터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며 불 켜진 방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사람일까?'
실루엣의 움직임을 보면 분명 젊은 여성인데 어떤 여성일까 하는 궁금증이 나날이 커져만 갔다 (변태라고 오해받을까 봐 내심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시절 촌구석 사춘기 소년의 호기심은 동정받았음 싶다)
어느 눈 내리던 날이었다
많은 눈은 아니었지만 아침이 다가올수록 눈발이 굵어지는 날씨였는데 그런 날 꼭 늦잠을 자는 나란 녀석!
배급소인 터미널까지 2km가 넘는 거리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달렸다
순번 3번이던 그 집의 실루엣이고 뭐고 간에 계단 위에 신문을 막 던지려던 찰나, 계단 안 쪽 방문이 열리며 그 실루엣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그 찰나의 순간은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흘러갔음을 굳이 상기하고자 한다)
하얀 목선이 드러난 숏컷 스타일, 노란 꽃무늬가 흐트러진 감색원피스, 그 위에 걸친 옅은 겨자색의 스웨터가 묘하게 잘 어울리는 여성이 계단을 내려서며 눈을 맞춘다
"어머나~ 오늘은 눈이 와서 신문이 안 올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더 반갑네요~"
차분한 음성에 우아한 표정의 미소 띤 얼굴로 늦은 신문을 반긴다 (이 따스한 기운은 뭐란 말인가?)
아니 소년을 반겼으리라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라고 믿고 싶었다)
"아~ 안녕하세요 신문이 늦은 건 아니고 제가..."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할 필요는 없었지만 내 입에선 마치 준비된 대답처럼 굳이 늦잠을 잤다고 이실직고한다
"항상 고마워요(므훗) 길 미끄러운데 조심하고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달달한 미소가 날아온다
"네~ 안녕히 계세요"
얼어붙었던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나는 달린다
뭐가 그리 부끄러웠는지 글을 쓰는 지금도 얼굴에 옅은 열감이 올라온다 ㅎㅎ
'이거 왜 이러지? 왜? 아줌마를 보고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 거지?'
시골에 살면서 고만고만한 여성들만 봐와서일까 그녀는 뭔가 특별해 보였던 모양이다 아니, 분명 특별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늦잠을 자지 않으려 애썼고 오히려 더 이른 시간에 배달일을 서두르게 되었다 아마도 그녀를 마딲뜨리기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왜? 모르겠다)
그러면서 오히려 개울 건너편 관찰자 시점의 시간적 여유는 늘어갔고 신문을 집어 가는 그녀를 훔쳐보는 소소한 재미가 쌓여가던 어느 날,
평소 보이던 그녀 대신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딸인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키는 엄마보다 큰 것 같았고 신문을 집어 드는 모양새는 딱 그 엄마에 그 딸이라는 확신이 드는 순간!
새로운 인물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개울 건너편에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이런 *장!'
피던 담배를 던져 버리고 옆구리 신문을 꽉 움켜쥐고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달려라 멈추면 터진다)
'아~ 쪽팔려 아~~'
속으로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렸다 매서운 골바람도 화끈거리는 내 얼굴을 식힐 순 없었다 (달려~ 달려~ go! go!! go!!!~ )
근데 쪽 팔려서 심장이 그렇게 뛸 수 있는 건가?
'신문배달도 그만둬야겠다'
다음날 새벽엔 아마 한 시간은 일찍 나간 거 같다
초등동창 아버지가 신문 배급소장님이었는데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 낼부터 신문을 돌릴 수 없다고 하자 무슨 말도 안 되는 핑계냐며 낮에 부모님이랑 통화해 보고 결정하자고 하시는 거다
(아~ 난 핑계도 약해! 진짜, 너무나 약해! 약점이야!ㅋㅋㅋ)
배달일을 그만두는 일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래서 택한 방법이 더 일찍 집을 나서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이 3번 집 창은 항상 불이 밝혀져 있었다 (마치 관찰자를 관찰하려는 듯)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발소리를 죽이고, 신문도 살포시 놓고, 뒷걸음질을 치는 모양새로 마무리하며 배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비대면으로 얌전히 놓이던 신문은 오래가지 못한다 3번 고객님과 다시 대면을 하게 되는데 계단 위 그녀가 그사이 키가 컸나 했더니 엄마 옷을 입고 그 위엔 아마도 아빠의 외투를 걸친듯한 머리숱 많은 숏컷 머리 늘씬한 키에 양볼이 탱탱한(아무래도 젖살로 의심됨) 앳된 소녀, 아니 3번 (작은) 고객님과의 정식대면이 이루어진다
'아~ 침착하자~ 뭘 훔친 것도 아닌데...'
고양이걸음으로 들어가다 멈칫하며
"흠~ 신문~"하며 막상 던지지 못한 신문을 작은 고객님께 건넸다
기다린 지가 몇 분은 흘렀는지 오므린 입술 위 콧구멍에선 하얀 콧김이 연신 뿜어 나왔다
'뭐야? 왜 저게 다 귀엽지? ㅋㅋㅋ'
아기 공룡이 답이 없길래 뒤돌아서는데
"저기요~ "
"응?"
"엄마가 주래요~" 하며 신문을 겨드랑이에 끼운 채 가제트팔처럼 두 손을 쭈욱 내민다
장갑도 끼지 않은 두 손에 작은 유리병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두 번째 따스함이 내 가슴속으로 스미는 순간이었다
'누구냐 넌?'
엄마가 전해주라던 음료를 주고받는 그 짧은 순간 역시 슬로비디오로 흘러갔음을 짐작했다면 여러분은 역시 천재다
ps :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답니다
추위 속 기다림, 눈 맞춤, 첫 대화 그리고 데워진 두유 한 병! (촌 놈 마음 뺏는 기본요소)
소녀의 엄마 실루엣에 두근거렸고 소녀가 내민 하얀 맨 손에 다시 한번 두근거리면서 첫 설렘이란 감정이 찾아왔고요
지금껏 살면서 모녀가 나를 설레게 한 적은 아직 없었답니다 ㅎㅎ
앞으로도 없을 테지요
전 이 소녀가 첫사랑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요
글쎄요
첫사랑이 맞는지는 이어지는 사연에서 여러분이 판단해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