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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옹 Jan 01. 2025

내 심장이 뛰지 않아

바보 멍충이

중학교 시절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갔다 동네 친구, 반 친구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당시 1000명이 채 되지 않던 중고등학교에는 두 개의 불량서클이 있었고 국민학교에선 느끼지 못했던 수놈들의 세상은 언제나 영역다툼에 목숨 거는 승냥이때들 같았으니 말이다 중학 2학년이 되어서야 친구관계가 정리되는데 그 친구집단은 나의 자의로 이루어진 관계라 할 수 없었다 중2가 되자 시골학교의 패거리 다툼에 하루가 멀다 하고 쌈박질이 일어났고 선배가 후배를 폭행하는 패거리들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

동네별로 조직적이지 못한 패거리들도 분명 존재했지만 내 고향 그 깡촌에 제법 오래전부터 똬리 틀고 있는 패거리가 하나 있었고 얼마 전 새로 생긴 신생 패거리와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던 격동의 시기가 하필 내가 막 2학년이 되었을 때다 신생 패거리에 납치되다시피 끌려가 실컷 두들겨 맞은 후 강제로 패거리의 막내 조직원이 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어느 날 중3선배, 고등학교 1, 2학년 선배들까지 포함한 대규모 전쟁이 있은 후 나는 새로 생긴 패거리에서 나름 역사와 전통을 가진 구 패거리의 막내 일원으로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게 된다 (이런 이야기는 그 당시 내 또래에선 그리 낯설지 않을 테다 더구나 나 같은 광산촌 아이들에겐 더더욱)


타의적 2학년 일진이 되었다 일진은 맞지 않고 학교 다니니 좋겠다고 생각하는 어설픈 아이들이 많은데 일진들의 선후배 관계는 군대 선후임관계를 비웃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숫 것들의 서열 정리가 된 후부터 나의 학창 시절이 제대로 시작한 듯하다 패거리의 막내들은 행동에 제약을 많이 받았는데 예를 들어 선배(직접 선배:같은 패거리에 속한 선배만 선배로 인정한다)에 대한 예절, 부당한 명령은 지금 생각해 보면 뜨악할 정도였다 이 나이에 굳이 내용까지 나열하고 싶진 않다 ㅋㅋㅋ


어느덧 3학년이 되었고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내 시야는 확장할 줄 모르고, 연애는 하고 싶은데 여자를 상대할 말발이나 기술도 없고, 연애는 아직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는데 같은 반 여자 일진 계집애가 네게 말을 건넨다

"야~ 너 이제 보니까 입술이 좀 잘 생겼다"

"야~ 이 계집애야 내 입술 쳐다볼 시간 있음 거울 속 니 입술이나 신경 쓰세요 어?"

가슴은 뛰기 시작했는데 입으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 나갔다

"야~ 잘 생겼다고 해도 지랄이야 00 이가 너 맘에 든다네"

"아니 이것들이 내가 무슨 시장 좌판 생선대가리도 아니고 어? 관심 없으니 신경 꺼라"

얼굴에 열감이 올라오는데도 또다시 입에선 거친 말이 나갔다

(난 학창 시절에 여자애들에게 막말은 했어도 물리적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 여자를 때리는 놈이 내게 맞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날 좋아한다는 계집애는 같은 반 00이었는데 사실 좋지 않은 소문의 주인공이기도 한 계집애였다

'발랑 까져가지고 양다리까지 걸치고 싶은 건가?'

그 계집애는 1년 직접 선배의 애인으로 알고 있는데 수놈끼리만 공유하는 정보 속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아니 이 계집애가 선배랑 사귄다고 날 물로 보는 거야 뭐야'

기분이 묘했다 나쁘기도 했고, 좋기도 했다

1학기가 끝나고 방학을 하던 날이었다 복도에서 그 계집애를 마딲뜨렸는데 대뜸 내게

"국어책 좀 갔다 줘"

"..."

"2학기 국어책 새로 받았잖아?"

"그건 왜?"

"그냥 좀 갖다 주면 안 돼? 개학하는 날 돌려줄게"

"..."

그렇게 새로 받은 2학기 국어책을 손에 쥐어 줬다 (국 끓여 먹는 건 아닐 테니까)

 

짧은 여름 방학이 지나고 개학을 하던 날 약속대로 00 이는 짙은 청색격자무늬로 포장된(그 위에 비닐을 입혀 코팅까지 한) 국어책을 내밀었다

"뭐야? 포장지가 왜 이래 별론데? 이러려고 책을 가져간 거야?"

"안에 살펴봐"

책장을 넘겨봤다 아니... 국어책은 표준전과 마냥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모두 알록달록한 색깔의 컬러펜으로 표시를 해 놓았다

"뭐야? 전과는 필요 없는데..."

"전과랑은 틀리거든 천천히 살펴봐"

실제로 그러했다 전과처럼 여기저기 중요 포인트에 밑줄이 쳐지고 주석이 달리기도 했으나 페이지 중간중간에 그림도 그려져 있고 짤막짤막 사심을 꼼꼼히도 적어놨다

"..."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거다"

그리곤 홱 뒤돌아 뛰어가는 계집애

'발랑 까져가지고 제멋대로네 참~"

연애라기엔 뭔가 찜찜하긴 했지만 암튼 내 인생에 첫 이성이 비집고 들어왔다

학교가 파하면 어느새 그 00인 우리 아지트로 스스럼없이 찾아왔고 시간이 흐르면서 찾아오는 횟수도 늘더니 머무는 시간도 늘어만 갔다 어떤 날엔 내가 가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고 재촉하는데 집에 갈 생각을 안 하는 거다 아지트 방장 녀석은 한동네 절친이었는데 이 녀석이 계집애들을 잘 상대하는 스타일이었는데 둘 사이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둘은 끝까지 모른 척 넘어가려는 거 같았다

솔직히 내가 먼저 좋아한 것도 아니니 사실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뭔가 찜찜한 마음을 품고 돌아서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답답한 건 못 참는 승냥이 시절이라 두 사람을 불러 앉혀놓고 소리치듯 말하였다

"니들 뭐야? 니들 눈 맞은 거야? 그럼 그렇다고 얘기하고 둘이 사귀던가? 왜 분위기 자꾸 이상하게 만들어?"

"..." "..

그때만 해도 생각이 깊지 않고 성격이 불같던 나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화를 내는 그런 사춘기 중병 환자였다

(쑥스럽지만 그 당시 내 별명은 '건드리면 터져'였다)

알고 보니 둘이 속닥속닥 한 건 다름이 아니라 계집애가 아지트에 찾아오며 아지트 쥔장인 친구 녀석과 말이 잘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다 보니 둘 사이에 여러 가지 고민상담도 함께 터놓는 사이였던 건데 둘 다 생각하기를 나란 놈은 성질이 모난 데가 있으니 계집애들이 겪는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엔 관심도 없을뿐더러 고민상담이라고 얘기해 봐야 답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 그래서 니들이 요즘 분위기가 그랬던 거였어? 그냥 둘이 사귀어~" 차갑게 말을 내뱉고 난 아지트를 나섰다

암튼 난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꼭 겉으로 표현을 그렇게 해 버리는, 내가 생각해도 제어가 되지 않는 나 자신이 싫었던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나인데도 불구하고 계집애는 내가 좋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계절은 가을로 접어든 어느 날 밤 계집애집 근처 아파트 옥상애서 만났는데 우린 아무 말 없이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이 게임에 지는 것처럼...

날 빤히 쳐다보는 계집애를 향해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얼굴 뚫어지겠다" 얼굴이 빨개지려 했기에 먼저 입은 떼었다

"너~ 키스해 봤어?"

(아~~ 요것 봐라 발랑 까져가지고)

"대답 안 할래"

"안 해 봤구나?"

(아~ 요것 봐라 선빵을 날리네?)

"야~ 이 계집애야 넌 그래서 선배(패거리 직접선배)랑 키스도 하고 *스도 했냐?"

"뭐?"

"다 알고 있어 너 내가 첨이 아니라는 거..."

"..."

다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가을바람이 훅~ 지나가면서 눈가를 때린다

"그 말을 믿어?"

"그럼, 아니라는 거야? 말을 해봐~"

그 순간 계집애의 얼굴이 빠르게 다가오며 내 입술을 훔친다

"흡~"

당돌한 행동에 무척이나 당황한 나는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계집애의 입술공격을 막아낸다 혓바닥이 입술 언저리에서 심하게 공격해 왔으나 꾹 닫힌 나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열 수가 없었다)

포기한 듯 입술이 멀어지고 계집애가 나직이 속삭인다

"담배냄새"

(하아~ 무슨 계집애가 이리 적극적이야? 존심상하게!)

다시 한번 긴 침묵이 이어졌다 마음의 정리를 해야 했다 난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나 자신이 너무너무도 꼴 보기 싫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정리를 해야 했다

"00아~"

"..."

"미안해~ 내 심장이 뛰질 않아 그리고, 아까 내가 한 말은 잊어!"

"헛소문이야 다 지어낸 거라고~"

"..."

"그 선배가 사귀자고 했지만 사귀지 않았고, 소문만 무성했던 거라고"

(우린 서로 어긋나 있었다 이렇게 어긋나면 되돌리기가 힘들잖아)

"아니~ 중요한 건 내가 널 여자로 보지 않는 거라고"

맘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내려와 달리기 시작했다 가을바람이 두 볼을 때리고 지나간다 (바보! 바보 같은 놈!)


ps : 제 사춘기가 그랬답니다 좀 바보 같았어요 강한 척하기만 하느라 속내를 너무너무 숨기고 싶었던 거죠

진심은 그렇지 않은데 표현은 절대적으로 마음과 반대로 행동했어요 아마 똑똑했던 그 계집애는 내 속내를 알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혀 내색하지 않았고요  우린 그냥 친한 남사친, 여사친으로 지냈답니다

세월이 흘러 마흔 살이 됐을 때 카카오스토리에서 소식을 접하고 연락처를 물어 직접 전화통화를 했었는데요 졸업 후 20여 년 이상 연락 없이 지냈지만 서로 알흠알흠 서로의 기본적 소식을 물어가며 지내고 있었더라고요 그 시절 그 계집애 친오빠는 우리 패거리 대선배라서 1년 선배인 00 이가 맘에 들어 사귀자고 대시했었지만 오빠백이 있었던 계집애는 당돌하게 거절한 게 맞더라고요 그리고 소문은 소문일 뿐이었고요

만일 그때 내 질문이나 그 계집애의 답변이 타이밍만 적절했었더라면 어땠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ㅎㅎ

풋사랑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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