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그림자의 대화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내가 그토록 기다려온 존재를 마주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찬란하던 모습에 작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어느 날은 너무 익숙해서,
어느 날은 너무 낯설어서.
도대체 사랑은 진짜였을까?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했던 걸까?
칼 융은 말한다.
인간은 무의식 속 ‘그림자’를 외면하고,
자신의 이상을 타인에게 투사한다고.
우리는 사랑 속에서
그 사람 자체보다
내가 되고 싶은 나를 그 사람에게 비춰본다.
그래서 사랑은 때때로
거울이 아니라, 스크린이다.
그 사람의 얼굴 위에,
나는 내가 꿈꾸는 장면을 투사한다.
하지만 환상이 깨진 뒤에도
그 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때가 사랑의 진짜 시작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환상에서 출발하지만
실제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서로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이 투사한 상(像)을 걷어내고,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마주 보는 것.
사랑의 눈부심은 환상에 있고,
사랑의 깊이는 실재에 있다.
[레옹의 시]
새벽 다섯 시
러닝화 끈을 매고
감사한 일을 세 가지씩 적는
그 사람을 닮고 싶었다.
그(그녀)는 단정했고
삶은 정답처럼 보였다.
흔들림 없이 빛나는 그 모습
어느새
닿고 싶은 마음에 시선이 갔다.
그러다 알람을 끄고
하루를 이불속에 묻어 버린 날
조용히 드러난
모자람,
느릿함,
외로움
그 모든 결이
그 자체로 숨 쉬고 있었다.
사랑은
완벽을 흉내 내는 순간보다
불완전함을 품어주는 장면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알람을 맞춘다면
다시,
사랑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레옹의 연구노트]
우리는 때로 ‘사랑’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환상이 깨질 때마다
그 사랑을 탓하기보다
내가 품고 있던 기대와 조용히 작별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너는 너로서,
나는 나로서,
사랑이라는 진짜 장면 속에 들어서는 거야.
사랑은 타인을 향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향해 되돌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 안에서
타인도, 나도, 더 진실하게 마주 보게 된다.
표지이미지:Perez CerdaRaf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