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내요, 철수 씨
타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모녀의 이야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다. 한데 이런 쉽지 않은 이야기를 감독은 코미디로 가볍게 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전혀 무겁지 않게 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추석, 가족들이 떼를 지어 극장을 찾기에 좋은 시기에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의 이야기를 하다니. 뭐랄까. 어쩌면 도박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게다가 천재지변도 아니고 방화로 인한 대참사의 이야기를 코미디로 만들다니. 그때의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나 겪은 혹은 겪어 내고 있는 이들의 아픔을 건드리는 일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데 개인적으로는 참 괜찮은 영화이지 싶다. 어두운 컴컴한 지하도가 두려운 철수와 김 씨에겐 당시의 참사는 여전히 겪어내고 있는 고통이자 트라우마다. 하여 그때의 말도 안 되는 참사가 다시는 재발되지 않도록 우리에게 기억해야 함을,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버리면 안 되는 일임을 각인시킨다. 어쩌면 감독은 그때의 아픔이 점점 잊혀 간다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에 화마 속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다가 정작 자신의 아내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은 백지처럼 자신을 지워버린 철수(차승원)는 동생이 운영하는 칼국숫집에서 우월한 외모를 뽐내며 밀가루를 밀며 산다. 반면 참사 당시 임신 중이던 혜영(신현빈)은 딸 샛별(엄채영)의 출산과 동시에 유명을 달리한다. 그리고 샛별은 아빠 철수의 존재도 모른다.
줄게, 내 피. 다 줄게
영화는 솔직히 초반 웃음 코드를 유발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쓴다. 낮은 지능의 철수가 보이는 과도한 표현과 아비 얼굴도 모르는 딸이 백혈병에 걸렸지만 씩씩하게 살려고 역시 과도하게 밝은 척하는 부분도 그렇다. 그리고 지능 낮은 아빠와 똑똑하지만 죽음을 코앞에 둔 딸의 첫 상봉에서 엉뚱한 아빠에게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나 과자 하나로 웃음을 주려는 장면은 사실 뻔한 신파를 넘어 애처롭기까지 하며 늘어질 대로 늘어진다.
타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는 소방관인 철수와 이번 생일이 마지막 생일 일지 모르는 시한부 친구를 위해 자신의 시한부 생명을 저당 잡히는 샛별의 모습은 닮아도 너무 닮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어쭙잖은 코미디가 부녀지간의 접점을 깨닫는 순간 눈물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삶을 망가트린 대구로 다시 돌아가는 이 지점이 새로운 삶을 펼쳐나갈 새로운 인생의 길이며 방향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철수의 이야기가 회자되면서 샛별이 새 생명을 얻는 장면에서는 살짝 불편하기도 했다. 사실 당시에 충분히 철수의 삶이 조명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타인의 생명을 구하던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져 딸아이가 출생한지도 모를 정도로 지능에 손상을 입었다면 말이다.
왜 십수 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울고불고 난리 치는지. 어쨌거나 철수는 한 명의 영웅이 아니다. 참사 속 화마에 갇힌 사람들을 구해내려던 모든 이가 영웅이었다는 점에서 샛별을 살리겠다고 나타날 단 한 명의 영웅을 대놓고 예상한다면, 내가 그랬지만 감독의 기막힌 연출의 낚시에 낚인 건지도 모른다. 검사를 받겠다고 줄을 선 사람들 역시 모두 영웅이라는 메시지에 다시 한번 눈물을 찍어내야 할지도 모른다.
뻔하지만 묘하게 뻔함 속에서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괜찮은 영화다. 개봉 한 달을 넘긴 시점에 관객 200만은 차승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