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이시니, 사랑하라.’-
어릴 적부터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다.
매달 학력고사를 치르던 시절,
월말고사가 끝나면
열 개 손가락의 손톱은 반쯤 사라졌고
피가 맺히기도 했다.
손톱은 자랄 틈도 없이
매달 그렇게 깎여나갔다.
손끝은 조여들었고,
오랫동안 아팠다.
성인이 된 후에도
이 습관은 꽤 오랫동안 나와 함께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시간이 넘도록
나는 또다시 손톱을 깨물고 있다.
‘결벽’, ‘완벽주의’, ‘욕구불만’…
그럴듯한 핑계를 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이건 마음 어딘가 깊은 곳에서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왜일까.
오늘은 무엇이 그리 답답한 걸까.
무엇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무엇이 만족스럽지 않으며,
무엇이 자꾸만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걸까.
그때, 문득
성경 속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 메로스의 거절.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 야엘의 담대함.
“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 악인의 어머니, 기다림과 절망.
왜일까.
왜 이런 이야기들이
이토록 길게, 자세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까.
그리고 마침내, 들려오는 한마디,
“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 그리하여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하지만 성경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십 년 후, 또다시 시작되는 실패.
하나님은 왜, 이토록 끊임없이
실패와 용서를 반복하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걸까.
며칠 전,
한 금융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
그 전화는, 내가 끝났다고 믿었던
한 믿음의 잔해를 다시 끄집어냈다.
침묵, 단절, 긴 한숨.....
내 삶의 마지막 사랑이길 바랐고,
영원히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사람.
그와 이별은
쉽지도, 명쾌하지도 않았다.
그가 남기고 간 빈자리를
일상으로 채워 넣으며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끝이라고 믿었고, 끝이길 바랐다.
그러나, 그 전화 한 통은
그 흔적이 아직
내 시간 속에 머물러 있음을 일깨웠다.
전화하고, 독촉하고, 화내고 —
할 수 있는 일은 많았지만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건 결국,
혼자 해결하고
혼자 마무리해야 할 일이란 걸.
그래서 또다시,
조용히 손톱을 물어뜯으며
견뎌내는 중이었다.
학창 시절, 시험지를 받아 들고
반 번호와 이름을 적으며
쉬운 문제부터 풀어내던 그때보다—
지금의 막막함은 훨씬 더 컸다.
나는 지금,
반 번호조차 쓰지 못한 채
몇 날 며칠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 내게—
메로스의 거절.
야엘의 담대함.
악인의 어머니, 기다림과 절망이
말을 걸어왔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실패와 용서 이야기.
오늘 나에게
그 말씀이 필요한 이유였다.
반복되었던 나의 실수와 실패,
거짓과 거절은 얼마였을까.
그리고 나의 기다림과 용서,
담대함은 또 얼마나 되었을까.
무언가를 꼭 움켜쥐듯,
내 손은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었다.
놓지 못한 무언가—
놓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놓을 수 없었던 어떤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후회였을까,
아니면,
용서하지 못한 기억의 조각이었을까.
그건 어쩌면
기도의 모양과도 닮아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기도조차 움켜쥐고 있었다.
내 안에 있는 말을
하나도 꺼내놓지 못한 채로.
기도의 '열림'을 기도했지만,
나는 닫힌 기도로
하나님 앞에 앉아 있었다.
주먹처럼 굳어진 손끝에서
주님은 내 마음을 읽으셨다.
그분은 말하지 않은 말들을
묵묵히 듣고 계셨다.
한마디도 하지 못한 그 기도의 시간,
하나님은
내 손끝을 먼저 만지셨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제, 놓아도 된다.”
기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오늘,
내가 멈춘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셨다.
꺼내지 못한 그 말들,
뜯긴 손톱과 함께 내뱉은 고통. ㅡ
하나님은 이미 들으셨고,
아셨고,
응답하고 계셨다.
'사랑이시니, 사랑하라.'
이 멈춤은
'풀리지 않음'이 아니라
기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