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컬러링, San Francisco

우리는 참 많이 닮았으므로

by 문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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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cking hot이 절로 입밖에 튀어나오는 날씨다. 판교 빌딩숲에 둘러쌓여 죽어라 내리쬐는 태양을 무심히 째려보고 있으니 머릿 속에서 샌프란시스코가 툭 하고 떠오른다. 당장 떠날 수는 없으니 듣기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누르게 만드는 노래. San Francisco


어릴 적 아빠에게 전화하면 늘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샌프란시스코가 어디에 붙어있는 도시인지도 몰랐으면서 이 노래만큼 경쾌하고 신나는 곳이겠구나 하고 생각해왔다. 언젠가는 꼭 아빠와 이 곳에 같이 가봐야지 하는 꿈이 이 노래의 멜로디 사이사이에 꼽혀있었다. 이 꿈이 영원히 꿈으로만 남게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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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다섯 이맘 때쯤, 나는 샌프란시스코 여행을 하고 있었다. 더운 날씨 쯤은 옵션 정도로 너그러이 포용하게끔 만드는 드넓은 바다, 생의 축복은 색의 축복이 아닐까 생각하게했던 컬러풀한 사람들의 옷차림과 색색의 건물들. 너무 답답하지도 너무 초라하지도 않게 적당히 붐비는 인파. 나는 한 손에 시원한 맥주를 쥐고 그 틈에 어색하게 낀 채로 이 도시의 흐름을 관망하곤 했다. 어느 언덕에 올라 지구의 맨틀까지 박혀있을 것 처럼 튼튼하게 자리한 금문교를 멍하니 바라봤던 그 날은 ‘아 이걸 보다니’ 싶었다. 아니, ‘아 이걸 나 혼자 보다니’ 였다. 벅차오르는 감정 사이로 움찔움찔 삐져나오는 울컥. 아빠의 컬러링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빠와 나는 닮은 점이 참 많았다. 첫째 딸은 무조건 아빠를 닮는다는 가설을 이목구비로써 증명해줄 증인이 바로 나였다. 우리는 생김새 뿐 아니라 취향마저 부전녀전이었다. 아빠는 음악을 좋아했다. 포크송을 즐겨들었고, 비틀즈를 사랑했다. 언젠가는 기타를 사와 책을 휘적휘적 넘기며 공부하더니 좋아하는 곡 몇 곡 쯤은 곧잘 연주해내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음악은 나에게도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 되었다. 아빠가 그리울 때는 아빠가 좋아하던 비틀즈의 Hey Jude를, 위로가 필요할 때면 콜드플레이의 Fix you를, 힘을 얻고 싶을 땐 오아시스의 Whatever를 꺼내듣곤 한다. 스무 살엔 곧장 기타 동아리에 들었다. 선배들도 놀랄 만큼 눈부신 발전을 보이며 신입생의 다크호스로 떠오를 뻔 했다가 짧은 손가락으로 인해 F 코드의 벽을 넘지 못하고 짧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긴 했지만. 아빠의 향수가 담긴 기타는 내게 늘 버킷리스트 1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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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일까.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것 역시 아빠로부터 물려받았다. 어릴 적부터 필름 카메라로 나와 동생의 모습을 가득 담아준 아빠 덕분에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 아빠가 바라본 나를 그 수백장의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디지털 카메라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도 아빠는 망설이지 않았다. 거금을 주고 손에 거머쥔 디카를 들고 울릉도 곳곳을 담아낸 아빠의 모습이 기억 속에 구름처럼 옅게 남아있다. 나 역시 스무 살이 되자마자 알바로 모은 돈을 DSLR과 바꿔왔다. 사진 클래스에 가기도 하고 출사도 떠났다. 친구들 사이에선 김중만 급 사진작가가 되어 그들의 인생샷을 담당하고 있다. 내 유년 시절의 찰나를 영원으로 남겨준 아빠. 나도 아빠의 세월의 흐름을 영원으로 담아둘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아빠는 술을 좋아하고 글을 즐겨썼다. 나 역시 학계에 숙취해소 분야가 있다면 못해도 박사는 되었을만큼 숱한 밤을 술과 함께 했고, 인생 어딘가가 턱하고 막혀 체할 땐 글을 아밀라아제 삼아 소화할만큼 글에 의지한다. 아빠는 소심하고 눈물이 많다. 난 혈액형에도 최상급이 있다면 A형의 최상급을 담당할 소심이인데다가, 지난 날 흘린 눈물을 모은다면 서울 쯤은 호수로 만들고도 남을 정도로 울보다. 이렇게 우린 ‘DNA의 신비는 이런 것이다’ 입증해내는 데칼코마니 부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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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인생의 행복을 차지하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이 아빠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이 즐거움을 함께 공유할 날을 참 오래 기다렸는데 아빠가 다친 후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어릴 적 내가 바라본 아빠의 등은 백두산도 가릴만큼 태산만 해보였다. 하지만 아픈 다리로 나를 배웅하고 돌아선 아빠의 뒷모습은 동네 뒷산도 버거워보일만치 말라버렸다. 저 뒷모습만큼 푸르렀던 아빠의 청춘도, 나를 번쩍 들어올려주던 두 팔도, 노랗게 빛나던 눈빛도, 뽀얗던 피부의 생기도, 오래 함께일 것만 같았던 아빠의 건강도 함께 말랐다. 모질게 차오른 건 내 눈물샘뿐.


아빠가 불로장생해 천년만년 살길 바라거나, 일확천금 로또에 당첨돼 문수르라 불리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어릴 적 내 모습을 사진에 담아주었듯 나이 들어가는 내 모습도 두 눈에 담아주길, 무너지고 싶을 때 안간힘으로 버텨야 할 이유가 되어주길, 세상에 내 편이 하나도 없는 기분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내 편으로 남아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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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딸’로 시작해 ‘사랑해’로 끝나는 아빠의 문자를 볼 때면 가끔 이 사랑이 버겁기도 하다. 내 사랑엔 미움과 원망도 박혀 있는데 아빠의 사랑엔 미안함만 가득해보여서. 그게 죄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도 괜찮다. 그 죄책감도 다 내 몫으로 받아들일테니 어릴 적 늘 조심조심 내 손톱을 깎아주던 그 날을 닮은, 아빠의 손톱을 깎아줄 날들만 오래오래 남아있다면.




@door__op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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