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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May 09. 2019

너무 시끄러운 고독

 나는 대형마트 안에서 약국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1층에 있었고 지하로 내려온 지는 2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여러 일을 전전(?)하다 약국에 정착했는데 (정착했는지 안 했는지 아직은 확실치 않습니다. 나는 매우 변덕이 심하고 카멜레온 친화적이며 변신의 귀재이기 때문입니다) 체코 작가인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는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데 딱 맞는 문장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인 ‘나’는 삼십오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하실에서 압축기로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래도 석 달에 한번쯤은 내 일에 대한 소신에도 변화가 닥쳐 
내 지하실이 혐오스러워지곤 한다.”    


 나의 작업장인 지하실은 "소장의 불평과 잔소리가 머릿속에서 윙윙대는가 하면 마치 확성기에 대고 악을 써대는 것처럼 귓속에서 맴도는" 곳입니다.

     

 마트 안에도 많은 소리가 있습니다. 


 아이들의 소리는 무척 생동감 있습니다. 100 데시벨을 넘기는 외마디 소리만 아니라면 울음소리도 들을 만합니다. 눈에 눈물 한 방울 없는 멀쩡한 얼굴을 하고서는 아빠와 엄마를 번갈아 쳐다봐 가며 우는 (시늉을 하는) 아이를 나는 곧잘 사랑스럽게 바라보곤 합니다. 고 녀석 참. 

 바닥에 드러눕거나, 뻗은 두 다리를 비비며 떼를 쓰는 동작을 대체 어디서 어떻게 익혀 알고 있을까요. 인근 인천이며 목동, 시흥, 안산에서 온 아이들도 있을 터인데 모두가 똑같은 동작을 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포스에 바코드를 찍을 때 나는 특유의 삑- 삐익 하는 전자음, 쇼핑용 카트가 끌리는 소리, 원통을 바닥에 대고 질질 끄는 듯 서걱거리며 집요하게 돌아가는 무빙워크의 마찰음, 하도 들어 이제 내 입에서까지 저절로 멜로디가 흘러나오곤 하는 각종 CM송들, 다음 번호표를 가진 고객의 순서임을 알리는 시그널 ‘딩동’,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목청을 높일 권리가 주어졌다는 확신을 가진 일부 몰지각한 인간들의 고성( 주로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는 "점장 나오라 그래"와 "당신 뭐야" 그리고 "이것들이 말이야"가 있겠습니다), ‘알뜰’ 쇼핑과 안전에 관한 각종 안내 방송 등.  아 안내 방송은 요즘 중국어로도 합니다. 

 이렇게 온갖 소리가 존재합니다.    


 고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린다는 소리는 어찌나 큰지, 마치 바로 옆에서 내 귀에 바짝 대고 떠드는 것 같습니다. 또한 집요하기까지 해서, 잊을 만하면 또 다시 내 머릿속을 쑤시지요. 


 “OO마트 △△점을 방문해주신 고객여러분께 감사드리오며 알뜰 쇼핑에 관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1시부터 딱 10분간만, 백 그람에 이천오백팔십 원에 판매하던 남춘천 양념닭갈비를 백 그람에 천 이백 원으로 할인하여 타임 세일을 진행하오니 무빙워크 옆 신선식품 행사장을 방문하시어 알뜰 쇼핑하시기 바랍니다.” 


 이 타임 세일은 물론 두 시, 세 시에도 반복됩니다. 당연히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일 년이 지나도 이 년이 지나도.

 세일은 네버엔딩, 무한반복입니다.    


 방송 말미에 반복되는 멘트, “즐거운 쇼핑 되세요”에는 정말이지 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싶어지는데 소싯적 영어 공부한 실력을 총동원해 이 문장을 번역해보면 얼마나 엉터리인지 분명해집니다. 

          Be a joyful shopping. 

         너, 즐거운 쇼핑이 되거라.

         즐거운 쇼핑(이) 되세요. 

 

 이렇게 즐거운 쇼핑도 모자라 때로는 편안한 쇼핑, 행복한 쇼핑이 되라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비록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정말이지 쇼핑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엉터리 문장인지 아닌지를 감별하는 노하우는 이처럼, 쉬운 외국어로 번역해보는 것입니다. 서울대 김영민 교수 같은 저명하신 분은 이를 ‘표현의 해상도를 알아보는 방법’이라는 멋진 표현을 쓰셨더군요. (졌다!)    


  “방금 방송에서요. 사람 말고, 쇼핑이 되라네요?”     


긴장 완화와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마트 높으신 분께 슬쩍 한 마디 던져보았지만 못 알아듣는 척해서 재미없어졌습니다. 무빙워크에서의 신발 끼임을 조심하라는 멘트와 같은 목소리인 것으로 보아 본사에서 일괄 녹음해 각 지점으로 내보낸 것 같은데 어느 부서에서 만든 문장일까 늘 궁금합니다. 


 언젠가 애프터서비스 차 방문한 인테리어업체 직원에게 천장에 달라붙어있는 스피커의 볼륨을 좀 낮춰줄 수 없겠냐고 물어보기도 했습니다만 소리를 조절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데요. 아예 연결선을 빼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윽고 약국 안은 조금 조용해졌습니다.      


 대낮 같이 밝은 불빛 아래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달이 떴는지 해가 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지하에는 소리만 가득합니다. 소리는 천천히 스며들어 내 뇌와 심장을 적시며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옵니다. 

 이렇게 소리에 붙들려 나의 일터가 지레 불쾌한 공간이 되어버릴 것을 나는 늘 두려워합니다.

 

 의식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의식하지 않아야 하는, 또 의식해서는 안 되는 것이 소리만은 아니지만 귀라도 '보호'해야 덜 다칩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혹은 너무 불행한 행복.


 마트 안 약국에 존재하는 이 두 가지 모순은 그 속에서 일하는 내게 주어진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방문객이 꽤 될 것임을, 그간의 경험이 내게 일러줍니다. 13시간의 중노동이 기다리고 있는, 아아 너무 불행한 행복이지요.

 아이의 장난감을 사고, 꽃집에서 꽃다발을 맞추고, 부모님의 건강을 위해 예산에 맞는 영양제나 혈압계를 알아보고, 겨우내 묵혀둔 세탁물을 맡기고, 이발을 하고, 문화센터에서 종이접기를 하고, 원 플러스 원 행사 중인 만두나 베이컨 따위를 사고, 새로 나온 냉짬뽕 시식코너를 기웃거리고. 

 그렇죠. 맞아요. 모두, 삶이 내는 소리지요...    

 

 마음의 소리를 듣는 귀를 더 활짝 열면 소음은 적게 들릴지도 모른다, 고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내 안에는 이미
불행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자리했다.


 시끄러운 고독 속에 아프지마오 약국은 밤 열한 시까지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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