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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우 Jul 10. 2023

비움과 채움 사이

게으른 완벽주의자는 쉽게 포기한다 

우리 집에서 5분이면 도착하는 뒷산에는 30분쯤 걸리는 등산로가 있었다. 뭔가 변화를 주지 않으면 유학생이 아니라 미래를 포기한 자퇴생으로 살겠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매일 아침 7시 반에 길을 나섰다. 잠은 쏟아지고 눈꺼풀은 감기고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오늘 하루 딱 이것만 성공하자는 마음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었다. 처음엔 모든 걸음이 힘들고 집에 오자마자 다시 잠에 빠졌다. 며칠 지나자 내리막길은 괜찮았다. 또 몇 주 지나자 숨이 덜 차고 재미가 붙었다. 

신기하게도, 아주 조금의 여유가 생겼을 뿐인데, 막 돋아나는 푸른 잎사귀 사이로 슬쩍 비치는 햇살이 보였다. 이끼가 많은 날과 낙엽이 많은 날, 달라진 발걸음 소리가 느껴졌다. 그리고 매 순간 변덕을 부리는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법을 배웠다. 하루는 귀여운 청설모 한 마리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근데 그 이후로 청설모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날 본 순간, '인간이다!' 하고 식겁해서 이사를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조금 미안했다. 


아침 등산을 통해 생활 습관이 드라마틱하게 좋아진 건 아니었지만 몇 분 일찍 눈이 떠지고, 알람 개수를 줄일 수 있었다. 오전 시간을 아무것도 못하고 버리는 일도 없었고, 체력이 늘어 다시 잠들지 않았다. 그렇게 남는 시간이 생겼고 이제 그 시간을 어떻게 쓸지 고민을 시작했다.


미국 학교들은 주로 교과서를 쓰지 않고 선생님마다 다른 수업자료를 사용한다. 그러니까 내가 예습을 하겠다고 교과서를 미리 읽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큰 틀은 비슷해서 Khan Academy나 Crash Course 등의 무료 자료를 모아 십 분짜리 강의를 듣는 것으로 시작했다. 무리하게 어려운 영어책을 읽어 보려고 하기보단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았다. The Perks of Being a Wallflower, The Fault in Our Stars 같이 미국 애들이 다 한 번쯤은 읽어봤다던 소설들을 내 페이스로 읽었다. 


사실 유학 준비라고는 하지만 거창한 활동을 한 적은 없다. 그저 내가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해 봤을 뿐이다. 시작만 해도 반은 간다고, 아무리 조금이어도 꾸준히 무언가 하고 있다는 생각이 좋았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서야 학교 밖이라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물론 성실한 인간으로 개과천선 하기에는 짧은 시간이라서, 아주 착실하게 미뤄 둔 일이 하나 있었다. 모든 유학생의 마음의 짐, 바로 짐 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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