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관측소가 주목한 2025년 사건과 공간들
파도가 잔잔할 때 사람은 그 자격을 증명하기 어렵다. 역풍을 맞을 때 연이 가장 높이 나는 것처럼, 위기의 순간 사람과 사회는 공간을 통해 본질을 드러낸다.
우리는 흔히 공간을 삶의 배경으로 인식합니다. 액체를 담는 무채색 그릇이자 무대 위 배경처럼, 공간은 삶이라는 사건의 수동적인 조건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죠.
하지만 공간은 사람답게 사는 게 무엇인지 선택하게끔 하는 아주 강력한 환경입니다. 저항과 표현, 다툼과 쟁취가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게 바로 공간입니다. 그래서 공간은 단순한 배경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2025년을 지나온 지금, 모두가 비슷하게 느끼는 것처럼 저도 공간의 정의를 조금 더 확장해야 함을 느낍니다.
평온할 때 공간은 침묵하지만, 위기의 순간 공간은 강력하게 본질을 드러냅니다.
2025년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공간이 곧 정치다"라는 명제가 가장 극적으로 증명된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지난 12.3 비상계엄 사태부터 6.3 대선, 그리고 새로운 정부의 공간 재편 시도에 이르기까지, 올해 용산과 여의도, 세종이라는 공간은 지금의 한국에 요구되는 정치와 공간의 질서,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성찰하게끔 했습니다.
2024년 12월 3일 밤, 평온했던 서울의 하늘을 찢은 헬기 프로펠러의 굉음은 한국 민주주의의 뇌관을 건드렸습니다. 특전사 헬기 3대가 국회 본청 뒤편 운동장에 착륙하고 무장 군인들이 의사당 유리창을 깨고 진입했을 때,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더 이상 일상적인 정치 행위의 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행정부의 폭주를 제어하고 헌법을 수호해야 할 대체 불가능한 공간이자, 시민들이 달려와 지켜내야만 하는 민주주의의 성지로 재탄생했습니다.
반면, 소통을 명분으로 청와대를 나와 용산으로 이전했던 대통령실은 역설적으로 그 위기의 밤에 불통의 요새가 되었습니다. 2022년 시작된 <용산시대>는 시민과의 거리를 좁히겠다는 약속으로 시작되었으나, 계엄 국면이라는 국가적 비상사태 속에서 시민과 철저히 단절된 섬이자 각종 공작을 주도한 곳으로 전락했습니다.
한 정치 사상가는 "주권자란 국가의 예외 상태에서 결단을 내리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 용산의 결단은 민주적 공간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길 잃은 주권자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습니다. 6.3 대선 과정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여러 후보가 용산시대의 실패를 선언하게 된 것은 권력이 시민의 상식과 괴리될 때 어떤 결말을 맞는지 보여주는 뼈아픈 방증입니다.
계엄의 공포를 걷어낸 것은 다시금 광장이었습니다. 계엄 선포 직후 시민들이 본능적으로 결집한 곳은 용산이 아닌, 광화문 광장과 여의도였습니다. 춥고 어두운 그날 밤, 촛불과 응원봉을 든 시민들의 물결은 광장이 단순히 비어 있는 배경이 아니라, 주권자의 의지가 살아 숨 쉬는 실체적 공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계엄 선포에 찬성 혹은 반대하는 쪽 모두에게 말입니다.
올해 초 탄핵 찬반론의 격돌과 이어진 6.3 대선을 위한 유세 과정은 '공간 쟁탈전'의 양상을 띠었습니다. 당시 이재명 후보는 여의도 공원에서 마지막 유세를 펼치며 국회가 지켜낸 민주주의의 회복을 강조했고, 김문수 후보는 또 다른 정치의 상징성을 띠는 광화문을 피날레의 무대로 선택했습니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여타 후보들이 서울에 집중할 때 홀로 보수의 심장인 대구를 마지막 유세지로 선택해, 기존 보수 진영의 본류를 자처하며 차별화를 꾀했습니다.
구경하 기자의 관찰처럼, 계엄 시국에 보수 세력은 과거와는 달리 전국에 흩어진 광장으로 나서며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1] 마치 공간에 담긴 상징성을 전유하려는 것처럼 말이죠. 광주 5.18 민주광장은 과거 쿠데타에 맞선 시민들이 다수 쓰러진, 무척 상징적인 곳입니다. 하지만 2월 15일, 계엄을 찬성하는 집회가 이곳에서 추진되면서 '광주가 지켜온 민주주의'와 '내란 선포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충돌을 벌였습니다.
올해 새롭게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즉각적인 공간의 정치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용산 집무실을 떠나 다시 청와대로 복귀하기로 했고, 이전은 올해 크리스마스 전후 완료할 예정입니다. 4년만에 이루어진 청와대 공간의 중앙 정치로의 복원입니다. 한동안 역대 대통령의 기록관이자 시민에게 개방된 문화공간 역할을 했지만, 청와대는 그런 호사를 오래 누릴 운명은 아니었나 봅니다. 대통령실 이전의 결과나 현 정부의 성공 여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적어도 불통 권력의 공간을 정상화하겠다는 메시지는 매우 뚜렸합니다.
더 나아가 현 정부는 '실질적 행정수도 세종 완성'을 핵심 국정과제 중 하나로 내세웠습니다. 여기에는 세종시 제2집무실과 국회 세종의사당 건립, 나아가 전국에서 세종시로의 접근을 2시간 이내로 단축하고 다양한 부처와 정부 위원회, 그리고 공공기관 이전 등 계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다 장기적으로는 서울 단극 중심성을 해소하고 전국 5극 3특 체제로의 재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2] 세종의 행정수도화는 이곳을 충청권 메가시티와 연계하여 국토 균형발전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방편입니다.
독일 베를린에는 나치 게슈타포 본부 터를 그대로 보존한 ‘테러의 지형(Topographie des Terrors)’이 있습니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단순 추모의 공간이 아닙니다. 나치라는 가해자들이 구축한 폭력의 시스템과 주요 인물, 조직을 해부하고 탐구하는 곳입니다. 나아가 그 내용을 현재적 의미로 재해석하고, 전시 및 아카이빙을 통해 공론화하는 살아있는 상징 공간입니다. 독일은 그 치욕스러운 폭력의 시스템을 땅속에서 파내어 전시함으로써, 잘못을 참회하고 다시는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공간에 새겼습니다.
2025년 대한민국이 추진하고 있는 ‘국가상징공간 공모전’과 일련의 공간 재편 작업 역시 이와 맥락을 같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겨울,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 공간과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목격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만들어갈 국가상징공간은 단순한 기념비적 건축물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한 상징이나 과거완료형 박물관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권위주의적 불통 정치에 대한 진짜 반성, 계엄과 입틀막을 비롯한 국가 폭력의 재해석, 그리고 이를 극복한 시민과 사회의 열망, 미래 한국의 비전을 살아있는 공간을 통해 담아내어야 합니다.
공간은 정직합니다. 말은 번복될 수 있지만, 공간은 기억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공간은 사회적 결단이 그 실체를 획득하는 곳입니다. 공간이 곧 정치입니다.
2025년을 보내며 다시 한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공간이 사람을 성장시키듯, 잘 가꿔진 도시 공간은 국가와 국민을 성장시킵니다. 질풍이 불 때 강한 풀을 알 수 있듯(질풍지경초, 疾風知勁草), 위기의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공간이 인간다움을 지탱하는 기둥인지 보여줍니다.
용산의 고립에서 여의도의 저항, 그리고 세종으로의 확장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치열한 현재의 역사를 국토 공간에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_________
[1] 구경하 기자 브런치 : https://brunch.co.kr/@isegoria/6
[2] 5극 3특 : 정부가 추진하는 '5극 3특' 전략은 전국을 5개 초광역권(수도권·동남권·대경권·중부권·호남권)과 3개 특별자치도(강원·전북·제주)로 재편하는 구상입니다.
* 이 글은 2025 도시관측 챌린지 활동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