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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제 Oct 26. 2024

열한 번째 편지 - 2024년 1월 18일

읽기, 쓰기

다정한 OO에게,


OO 안녕? 지난주에 편지를 보내지 못해서 미안해. 아이들이 독감과 감기에 걸려서 일주일 동안 집에서 돌보느라 편지를 제대로 쓰지 못했어. 휴재하고 싶지 않아서 틈틈이 쓰긴 했는데, 나까지 감기에 옮아서 하루 앓아눕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했어. 독감에 걸렸던 첫째는 고생 많이 했지만 다행히 지난 토요일부터 완전히 컨디션을 회복했어.



한 주 휴재했는데 무척 오래 편지를 못 쓴 기분이야. 마지막 연재일이 다가와서 그런 걸까? 편지를 준비하던 때가 기억난다. 일과 삶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고 여러 방식을 고민하다가 지금처럼 서간 에세이 형식을 택했지. OO와 친구 사이처럼 글을 주고받으며 느슨하면서 단단하게 엮이고 싶었기 때문이야. 내 편지가 OO의 세상을 조금이라도 다정하게 만들기를 바랐어. 


오늘은 내가 희망하는 ‘읽고 쓰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퇴사한 지 세 달 반정도 지난 무더위가 한창이던 작년 여름 어느 날이었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원했고 여전히 원하는 길이 작가라는 걸 받아들이고 당장 그 길을 걸어보기로 결심했어. 어떤 경험들이 이런 꿈으로 이어졌는지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



읽는 사람은 쓰는 사람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하잖아. 나도 그런 경우인 것 같아. 어렸을 때부터 가슴 뛰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을 때면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열망을 느끼곤 했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학창 시절 내내 책을 무척 좋아했는데(책만큼 운동도 좋아했고), 중학교 때까지는 주로 소설과 역사책을 읽었던 것 같아. 소설 중에서도 특히 역사 소설과 판타지 소설, 로맨스 소설을 주로 읽었어.


이쯤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멋진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던 것 같아. 사실 중학교 1학년 때, 천리안 같은 PC통신에 소설을 연재한 적도 있어. 지금의 웹소설 같은 장르라고 할 수 있을까? 처음 제대로 글을 썼던 건데, 구체적으로 왜 쓰기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 스무몇 해도 더 지난 일이라 소설의 줄거리도 흐릿한데, 아마 사춘기 중학생들이 주인공인 연애 소설이었을 거야. 나와 내 친구들을 소설 캐릭터들에게 투영했던 것 같아. 가족들은 물론 친구들에게도 내가 소설을 쓴다는 건 절대 말하지 않았지.


고등학교 때는 본격적으로 다양한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어. 국어 수업에서 흥미를 느껴서 한국 근대 문학과 세계 고전 문학을 많이 읽었고, 『냉정과 열정 사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같은 일본 로맨스 소설도 꽤 좋아했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 『연금술사』,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같은 베스트셀러 책들도 빠트리지 않고 읽었지. 논술 시험 준비하려고 읽은 이유도 있지만 『자유론』, 『역사란 무엇인가』, 『육식의 종말』 같은 명저들도 많이 읽었어. 입시 공부에 치여서 글을 쓸 시간은 없었지만, 언젠가는 꼭 글을 쓰겠다는 꿈이 생겼지. 중1 때도 랩 가사를 끄적이기도 했는데, 고등학교 2, 3학년때는 꾸준히 랩 가사를 쓰기도 했어. 당시 드렁큰 타이거, 에픽하이, 주석 같은 국내 래퍼들을 참 좋아했거든.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야자 시간에 나름대로 진지하게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수첩에 가사를 쓰곤 했어.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도 글에 대한 열망이 큰 영향을 준 것 같아. 상경계나 법학보다 문과를 가고 싶은 마음이 컸고, 현역 때는 신문방송학과, 재수 때는 영문과에 지원했어. 국문과를 지원할 걸 그랬나 싶지만 당시에 국문과 가면 먹고살기 너무 힘들다는 말이 많아서… 근데 막상 대학에 입학하니까 부지런히 노느라 책은 많이 읽지 않았던 것 같아… 교양 수업에서 김영하 작가님의 『검은 꽃』을 읽고 한국 현대 소설에 대한 관심이 생겼던 건 기억이 나. 『돈키호테』 한 작품만 한 학기 동안 배우는 교양 수업도 들었는데, 이 수업도 정말 재밌었고 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이 다시 자라나기도 했었지.


복학 후 전공 공부를 제대로 하면서 영미문학의 매력에 깊이 빠졌어. 좋아했던 작가와 작품이 많은데, 특히 좋아했던 작가는 Y.B 예이츠,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하디야. 동시에 우리나라 현대 정치 사회에 관심이 많이 생겨서 다양한 역사, 정치, 사회 분야 책을 읽기도 했지. 3학년 1학기쯤이었을까? 조지 오웰의 소설에 푹 빠져서 그의 작품처럼 시대를 고발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 반면, 위대한 작가들의 훌륭한 작품들을 읽을수록,  나는 재능이 부족해서 작가가 될 수 없다고 겁먹기도 했어.


직장 생활 10년 동안 독서의 지평은 넓어졌지만, 글쓰기에 대한 꿈은 서서히 사라져 갔어. 사회생활 초반에는 주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책을 골랐어. 일을 잘하기 위해서, 재테크를 잘하기 위해서, 사회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 등등. 두 번째 회사로 이직하고 연차가 좀 쌓인 후에는 인문, 과학 분야 책을 주로 읽었지. 핑계일 수도 있지만 사는 게 점점 팍팍해지고 회사와 가정에서 책임이 늘어나니까 책을 읽는 게 힘들 때가 많더라. 마찬가지로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은 거의 남지 않았고.



퇴사 후 갭이어를 보내면서 내 일과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되자, 글쓰기에 대한 열망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어. 여전히 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고, 내가 가진 역량과 재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더라도, 가장 의미 있게 쓸 수 있는 분야도 글이라고 생각했어. 치열하게 일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글로 쓰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나기도 했지.


왜 ‘읽고 쓰는 삶’을 원하는지를 길게 이야기해 보았어. 사실 단순하지. 언제나 책, 글 읽기가 가장 좋은 사람이었고, 좋은 글을 읽다 보니 좋은 글을 쓰고 싶었다는 이야기.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글만 쓸 수 있다면 어떤 글을 쓰고 싶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소설을 쓰고 싶어. 인생의 태도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동시대의 역사와 사회, 문화를 담은 장편 소설. 『안나 카레니나』, 『돈키호테』, 『파친코』, 『위대한 개츠비』처럼.


다른 질문도 떠올려 봤어.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어떤 글을 쓰고 싶을까? 그렇다면 오랜 기간 연구한 전문 분야 또는 오랜 세월을 거친 자전적 경험에 대한 인문서 또는 에세이를 쓰고 싶어. 『코스모스』, 『월든』,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처럼.



앞으로 글을 쓰면서 지식보다는 지혜를 좇고 싶고, 정답보다는 가능성을 찾고 싶고, 교훈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 위선도 위악도 없는, 진정성 있고 담백한 글을 쓰고 싶어. 고통받고, 상처받고, 차별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싶어. 인간과 생명, 세계와 우주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싶어. 하지만, 본질적인 의미 없이 글을 위한 글,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아. 글 바깥에 있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글을 쓰고 싶지 않아.


당분간은 에세이나 서평, 칼럼을 주로 쓰려하고, 어느 시점부터는 단편 소설을 써보려 해, 몇 년 후에는 르포타주나 인터뷰집도 도전해보고 싶고. 이 모든 길이 모아져 너무 늦지 않은 생의 어느 시점에 장편 소설에도 도전하고 싶어.


내 글이 이 비정한 세상에 다정한 물결을 아주 조금이라도 퍼트린다면 좋겠어. 내 글이 다정한 사람들의 삶을 그리고 그들의 사회를 아주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끌어간다면 좋겠어.



<엮은이 닷노트> 첫 번째 이야기는 ‘읽고 쓰는 삶’의 첫걸음이었어. 연재 마지막을 앞두고 두 번째 이야기도 고민해보고 있어. 아마 책과 관련된 주제로 정할 것 같아. 추천하고 싶은 책을 소개하며 내 생각을 담는 글? 전문적인 서평은 아니고 독서 에세이라고 볼 수 있을까? 첫 번째 이야기보다는 개인적인 이야기의 비중을 줄이게 될 것 같아. 너무 오래 쉬지 않을게.


에세이 쓰기에 대한 마음의 벽을 허물기 위해 시작한 <아빠는 퇴직, 엄마는 복직> 연재도 동시에 끝을 향해 가고 있어. 두 번째 브런치 연재 시리즈로 가장 치열하게 일했던 소치올림픽 업무 경험을 풀어보려 해. 많이 기대해 줘!



참, 지난번 편지 마지막에 언급했던 이직 관련 식사 자리에는 잘 다녀왔어. 충분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었고, 제안받은 직무도 굉장히 맘에 들었고, 연봉 조건도 상당히 놀라운 수준이었어. 결과적으로 이번 상반기 취직을 목표로 함께 준비해 보기로 했어. 추천 채용 형식이긴 하지만 일반 채용과 동일하게 채용 전형을 모두 통과해야 해.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두 직장의 업무 경험이 연결되어 새로운 기회를 얻은 것 같아.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마음이야. 꼭 좋은 결과 얻어서 다시 일을 시작하고, 작가의 길도 계속 도전해 보면 좋겠다.


OO, 그럼 다음 주에 마지막 편지를 보낼게.


오늘도 내일도 다정한 하루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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