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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제 Oct 26. 2024

열 번째 편지 - 2024년 1월 4일

직감

다정한 OO에게,


OO 안녕? 2024년 첫 편지를 보내. 설 연휴는 어떻게 보냈어? OO는 어떤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을까 궁금하다. 무엇보다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기를 바랄게. 새해 복 많이 받아.



이번 연휴 동안 사샤 세이건의 에세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를 읽었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내 인생책 중 하나인데, 사샤 세이건이  바로 칼 세이건의 딸이야. 사샤는 이 책에서 인간의 생애주기를 우리 일상 속 작은 의식들(Rituals)과 연결 지어서 삶의 순수한 기쁨에 대해 이야기해. 크고 작은 일상의 의미를 기억하고 축하하는 일이 바로 인간이라는 이토록 작은 존재인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법이라고 말하지. 칼 세이건의 딸답게 과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게 글에서 느껴져. 또, 사샤만의 담담하고 아름다운 문체도 돋보이는 글이야.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아이들을 많이 떠올렸어. 새삼 아이들이 우리에게 온 일이 얼마나 기적 같은 감사하고 경이로운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고, 그동안 아이들과 일상에서 크고 작은 기쁨을 나눠왔다는 점이 다행스러웠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과 어떤 의식을 공유하며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았지.



첫째 딸을 처음 만났던 순간은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거야. 출산이 임박했을 때, 어두운 분만실 한 편에서 벽 쪽으로 뒤돌아서서 아내와 아이가 건강하기만을 기도한 영원 같은 시간. 모든 게 멈춘 듯 한 순간, 들려온 아이의 울음, 세상을 향해 내뱉은 첫 숨.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떨리는 손으로 자른 탯줄. 몸을 씻어주는 순간에도 울음을 그치지 않고 손발을 쭉쭉 피는 아이. 간단한 검사를 마치고 겉싸개에 쌓인 채로 돌아와 내 품에 안긴 너무나도 작고 소중했던 아이. 무한한 우주의 시간과 공간에서 끝없이 거듭된 우연으로 우리가 만나게 된 순간.


아내와 결혼한 후로 항상 가정적인 남편이 되고자 애썼고,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좋은 아빠가 되고자 애썼어. 당연히 육아가 힘들 때도 있지만 아이들을 돌보며 얻는 충만한 감정은 그 어떤 가치에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것 같아.


사실 난 결혼이나 육아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던 사람은 아니었어. 내가 평생 누군가의 동반자로 살아갈 수 있을지,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지. 아내를 만나고 모든 게 달라졌어. 아내와 점점 친밀한 관계가 되고 깊은 속마음을 나누면서 이 사람과는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지. 신혼 때 아내가 아이를 갖자고 말했을 때, 아내와 함께라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어. 일상의 크고 작은 기쁨부터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까지 함께 잘 해낼 것 같았고,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행도 이겨낼 것 같았어.



결혼과 출산, 육아 등. 인생의 중요한 선택 앞에서, 나는 항상 나의 직감을 믿었어. 결혼하면 어떤 게 좋고 어떤 게 나쁠까, 아이를 키우면 나의 인생은 더 좋아질까 나빠질까, 선택의 순간 이런 질문들에 대한 예측과 계산은 아무 소용이 없었지. 그저 아내와 함께라면 괜찮겠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고 그 직감을 따랐어. 지금까지도 내 직감을 따른 것을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정답이 없는 인생의 선택을 마주칠 때, 우리는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곤 하지. 사실 이런 선택의 결과는 대부분 직접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것 같아. 새로운 경험으로 인해 내가 어떻게 달라질지 아무도 미리 예상할 수가 없는 거야.


누군가 30대 초반까지의 나에게 결혼과 육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면, 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수많은 결혼의 장단점들을 나열하며 나에겐 단점이 더 커 보인다고 말했을 거야. 누군가 지금 나에게 결혼과 육아가 어떤지 묻는다면, 오로지 직접 경험해 봐야만 알 수 있는 일이고, 난 결혼하고 아이를 낳길 잘했다고 대답할 거야. 


나의 직감을 따른 덕분에 나는 충만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고, 그 직감은 바로 아내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생각해. 그 사랑은 다른 차원의 사랑으로 이어져 우리 아이들에게 향하고 있지. 이 사랑 안에서 난 현실의 고난도 내면의 어두움도 이겨내고 있어. 사샤 세이건의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은 문장을 들려주고 싶어.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이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참, 얼마 전 편지에 올해 여름쯤부터 다시 회사를 다녀볼 생각이라고 말했잖아. 마침 이번주 화요일에 한 분이 연락을 주셔서 다음 주에 몇 분과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어. 이 분들이 다니는 회사는 지금 내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인데, 작년에 이직을 고민할 때도 서로 논의가 있었던 곳이야. 2월 초쯤 연락드리려 했는데 먼저 연락을 주셔서 참 신기했어. 나를 충분히 인정해 주는 좋은 제안을 받는다면 최선을 다해 그 기회를 잡아 보려 해. 좋은 소식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럼 다음 주에 또 편지 보낼게.


오늘도 내일도 다정한 하루 보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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