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다정한 OO에게,
OO 안녕? 창 밖으로 밤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OO에게 글을 쓰고 있어. 오늘 날씨가 참 짓궂어. 우박 섞인 눈이 세차게 쏟아 내리고, 바닷바람은 내 장우산을 단숨에 뒤집어버렸어. 이런 험한 날씨 덕분에 OO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순간을 더 선명하게 기억할 것 같아.
오늘 낮, 기차에 몸을 싣고 강릉으로 떠나왔어. 네시쯤 강릉역에 도착해서 안목해변으로 왔는데, 바로 내일 오후에 다시 서울로 향할 예정이야. 여행지 이곳저곳에서 OO에게 편지를 쓰려고 해. <엮은이 닷노트> 첫 번째 이야기의 마지막 편지.
작년 1월에도 홀로 밤기차를 타고 강릉에 왔어. 떠나는 날 점심쯤 즉흥적으로 결심한 여행이었지. 그 여행에서 퇴사를 최종적으로 결심했어. 삶은 참 묘한 것 같아. 지금 내 모습을 1년 전 여행 때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 1년 후의 모습도 지금은 전혀 알 수가 없겠지.
두 가지 이유로 이번 여행을 계획했어. 우선, 일상을 벗어난 환경에서 오로지 책에만 몰입하고 싶었어. 최근 몇 달 동안 내 삶의 중심에 책이 자리 잡았어. 좋은 책을 더 읽고 싶은 욕심은 점점 자랐고, 읽고 싶은 책들은 책상 뒤편에 점점 쌓였지. 빼곡한 글자 사이에서 헤매는 게, 책 속에서 저자와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누는 게,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울고 웃는 게, 이 책 저 책을 연결하며 내 세상을 넓히는 게, 무척이나 순수하게 즐거워서 단 하루라도 책과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어.
『이처럼 사소한 것들』, 『자기 결정』, 『삶의 발명』 세 권을 집어 왔어. 여행 내내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싶었어. (강릉행 기차에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다 읽었는데, OO도 꼭 읽어 보면 좋겠어!) 다시 회사에 다니면, 이런 행복한 시간이 사라질까 봐 불안했나 봐. 물론 회사에 다니면서도 시간 날 때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애쓸 테지만, 현실이 쉽지 않다는 걸 잘 아니까.
바로 그런 마음이 여행을 떠난 두 번째 이유야. 갭이어를 마무리하며 마음을 다잡고 싶었어. 요즘 오랜만에 이력서를 매만지며 면접을 준비하는데, 좋은 기회이고 필요한 결정이란 걸 알면서도 여전히 고민이 많아. 다시 회사 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 다시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지, 이 선택이 최선인지.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땐 아는 게 없어서 두려웠다면, 지금은 너무 많은 걸 알아서, 특히 나 자신을 너무 많이 알아서 다시 시작하는 게 두려운 것 같아. 잠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이런 불안감을 잠재우고 마음을 담금질하고 싶었어. 짧은 여행 동안, 쓸데없이 괴로운 마음을 가슴 깊은 곳에 묻고 돌아가려 해.
다시 강릉에 온 이유는, 작년 1월 퇴사를 결심할 때 왔다는 의미도 있지만, 강원 동계청소년올림픽이 열리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어. 몇 번 이야기했듯, 체육 관련 공공기관이 내 첫 직장이었고, 담당 업무도 국제 스포츠 대회 선수단 파견 업무였거든. 꿈같은 일이었지. 10년 전 이맘때쯤 러시아 소치에서 선수촌과 경기장을 정신없이 오고 갔는데. 그 해 여름엔 난징 하계청소년올림픽도 담당했고.
완전히 새로운 분야로 커리어를 전환하려고 하는 중이라, 지난 10년 동안의 커리어를 완전히 매듭짓는다는 뜻으로 이 대회에 와보고 싶었어. 첫 회사를 그만둘 때, 나중에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 ‘관중으로 놀러 오기’ 그리고 ‘자원봉사 활동 해보기’였거든. 이 여행에서 하나를 이뤘네.
사실 평창올림픽에 꼭 가보고 싶었어. 회사를 그만두기 몇 달 전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로 파견 갈 기회가 있었는데, 여러 이유로 거절했던 게 못내 아쉬웠거든. 그 기회를 잡았다면, 지금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 평창올림픽이 열렸을 땐, 회사일과 육아로 너무 바빠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어. 내일 강릉 올림픽파크를 구경하고 쇼트트랙, 컬링 경기를 볼 예정이야. 경기장에 들어서면 어떤 기분일지, 어떤 생각이 들지 기대된다.
안목해변 카페에서 두 시간 정도 머무르고 숙소 근처 맥주집에 왔어. 얼마 만에 혼자 밖에서 맥주를 마시는 건지! 서른 즈음까지는 혼자 무얼 하는 게 참 쑥스러웠는데, 어느새 혼자 있는 시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네.
수제 맥주와 치즈 플래터를 주문하고 옆 테이블을 봤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여서 놀랐어. 유니폼을 입은 외국인들 사이에 안면이 있는 IOC 직원 한 명이 있어서. 이게 정말 무슨 신기한 일인지. 아직 나를 못 알아본 것 같아. 주로 메일로 일했고 만나서 얘기 나눈 건 두세 번 정도밖에 없어서 기억하기 힘들 거야. 지금 내 모습은 그때와 꽤 다르기도 하고.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참 신기하다.
글을 다시 이어가기 전에 지난 열한 편의 편지를 모두 읽어 보았어. 눈시울이 괜히 붉어지네. 편지를 쓸 때 이런 적은 없었는데. 술기운 때문인지.
<엮은이 닷노트>를 처음 알릴 때 ‘일과 삶’에 대해 진솔한 생각을 쓰겠다고 했는데, 그동안 얼마나 내 이야기가 OO에게 가닿았을지.
그동안 OO에게 들려준 것처럼 내 삶의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어. 인생에는 참 묘하고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내가 확실히 아는 건 매 순간마다 진실한 삶의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는 점, 모든 선택마다 한 점의 후회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는 점,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다는 점,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점이야. 그럼에도 자주 실수하고, 때때로 후회하며,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겠지만, 삶은 그저 흐를 뿐이고, 그렇기에 인생이 더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게 아닌가 싶어.
앞으로 내 이야기를 이렇게 써나가고 싶어. 항상 열망을 좇으면서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자신의 일과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 인생의 의미와 이유를 내 안에 두고, 나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살면서, 그 길 위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이야기. 부족한 점도 많지만, 비정한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연대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이야기. 내 글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다정하게 만들고, 내 삶으로 조금 더 살만한 세상, 함께하는 사회를 만드는 이야기.
이 모든 이야기의 이유는 우리 가족이야.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큼 어떤 아빠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커. 지금처럼만, 항상 아내와 아이들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가족을 위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거야.
여행 둘째 날 오후, 강릉의 한 카페에서 다시 편지를 쓰고 있어. <카페 툇마루>라는 곳인데 달콤한 시그니처 커피 맛도 좋고 통창으로 보이는 흩날리는 눈과 소박한 풍경도 좋다. 작년 여행 때도 왔던 곳이야.
오전에는 올림픽파크를 구경하고 쇼트트랙 경기와 컬링 경기를 보았어. 경기장을 울리는 관중들의 박수와 환호성에 내 가슴이 다시 뛰었어. 전 세계에서 온 어린 선수들이 경기에 완전히 몰입한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내 삶에 더 몰입했어. 한편으로는 함께 일했던 사람들,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선수들이 떠올랐고. 어쩌면 내가 이곳에 담당자로 올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기분도 묘했어.
이제 정말로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장을 쓰게 되었네. 어젯밤 맥주 한 잔 마시고 쓴 부분을 다시 읽어 보니 좀 쑥스럽다. 인생의 태도에 대해 쓰자면 항상 과하게 진지한 내용을 쓰게 되는 것 같아.
이제 기차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어.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 내 편지를 받아준 OO를 생각하고 있어. 어떤 사람인지도 무척 궁금하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도 많지만, 그저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내 글을 읽어준 덕분에, 나와 연결되어 준 덕분에, 중요한 전환점에서 큰 용기를 얻었어. 내 삶의 이야기 속에 찾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
어젯밤 맥주집에서 그 직원에게 인사를 건넸어. 내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함께 일한 건 기억하고 있더라. 어젯밤처럼, 언젠가, 어디에선가, 우연히 OO를 만난다면, 반갑게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기를 바라.
낭만적인 밤바다를 그리다 폭설과 강풍을 마주쳐도, 우리의 삶을 긍정하고, 우리의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자. 작은 일상에서 더 자주 기뻐하고, 사랑하는 이를 더 자주 안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더 자주 웃자. 생명과 자연과 우주의 경이를 느끼고, 모든 존재를 더 사랑하자.
다시 만나는 날까지 항상 잘 지내기를 바라.
그때까지 언제나 다정한 하루 보내기를.
OO,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