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작가의 탄생

by 민달이


스스로를 b급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 누가 그렇게 부르고 싶겠는가. 하지만 이제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일 뿐이다. 꿈을 꾸었지만 꿈을 이룬 걸까? 모르겠다. 이룬 것도 아니고 이루지 못한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어린아이처럼 울상을 짓고 있다.


책을 좋아했던 걸까, 쓰는 행위를 좋아했던 걸까, 쓰고 난 뒤의 무언가를 원했던 걸까. 등단을 하고 난 뒤 나는 오히려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내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 매일 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게다가 끔찍한 일도 일어났다. 오히려 등단 전보다 더욱 책을 읽지 못했다. 쓰지 않고 책을 읽고 있으면 뭔가를 더 써야 할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고, 무언 갈 쓰고 있으면 읽지 못하는 마음에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쓰는 즐거움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 소설들을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우울했다. 쓰고 나서 읽어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글로만 보였다. 다른 작가들은 눈에 띄게 좋은 글을 쓰는데 역시 내가 안 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라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누군가 자꾸만 내 뒤를 쫓아오는 상상에 이유 없이 마음이 조급해졌다. 결국 나는 쓰지도 읽지도 못한 채로 여러 해를 흘려보냈다.


쓰지도 못하고 읽지도 못하는 날들이 많았지만 책장 앞에 있을 때는 행복했다. 한 권 한 권 제목을 읽고 작가의 이름을 눈으로 보면서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거나 읽지 않은 기대감을 간직하는 일이 좋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한쪽으로 몰기도 하고 출판사 별로, 혹은 크기별로 정리하면서 우울한 날들을 버텨냈다. 책장에 빼곡한 책처럼 예쁜 술병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집에 술이 많지도 않고 잘 마시지도 못하지만 책 속에서 표현되는 술에 대한 묘사나 영화에서 보이는 그 순간의 분위기가 나를 달랬다.


내가 좋아하는 건 진토닉. 말이 진토닉이지 내 마음대로 진과 탄산수와 라임즙을 섞는 정도였다. 묽었다가 진했다가 용량도 대중없었다. 시원한 진토닉을 마시고 있으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탱커레이나 봄베이도 좋아 하지만 특히나 헨드릭스에 가니쉬로 오이를 곁들이면 우울했던 기분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야구선수 헨드릭스와 헨드릭스 진이 나오는 이야기를 역시나 발표하지 못한 어느 단편에도 쓸 만큼 헨드릭스를 좋아한다.) 상쾌한 오이향과 날듯 말 듯 은은한 장미향은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는 듯했다.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는 여름이면 헤밍웨이가 즐겨마시던 모히토와 다이퀴리를 마시며 글을 썼다. 겨울이 되면 눈에 덮인 개선문을 생각하며 향긋한 칼바도스를 떠올렸다.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가 거닐던 쿠바에 가고 싶었고, 프랑스에서 압생트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예술가들을 생각했다. 하루키의 소설에 나오는 많은 술과 음식들에 군침을 흘리는 건 당연했다. 술잔을 손에 든 프랑수아즈 사강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던 레이먼드 카버의 삶을 생각했다. 수많은 소설 속 주인공들이 고급 브랜디를 마시거나 알코올 내가 풍기는 싸구려 보드카를 마시는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어쩐지 가슴 한 켠이 묵직해오고 코끝이 찡해졌다. 그건 기쁨과 슬픔, 분노와 고독을 애도하는 가장 좋은 행위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작년에 썼던 1000매짜리 장편소설이 어느 공모전의 최종심에 올랐지만 결국엔 수상하지 못했다. 며칠 동안 많이도 힘들었던 생각이 난다. 잡힐 듯 말 듯 나를 놀리던 위대한 문단의 금빛 인증서는 역시나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쥐지 못한 빈손을 골똘히 내려다보았으나 생각보다 우울하진 않았다. 그 긴 시간 동안 어쩌면 나는 조금씩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아 가고 있었던 것일까. 깊이 아팠던 건 사실이지만 금세 덤덤한 기분이 들었다.


더는 아니구나. 여기까지가 내 자리구나. 마음을 다스린 나는 책장 구석에 있던 잭다니엘을 꺼냈다.

차가운 잔에 얼음을 넣고 위스키와 콜라를 섞었다.

30초쯤. 바그르르 이는 탄산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달콤한 잭콕을 천천히 마시며 B급 작가의 탄생을 자축했다.

keyword
이전 10화삶이, 얼굴에 정면으로 뱉은 침처럼 느껴질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