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타임머신이 없어도 갈 수 있는 80년대 서울

북한산 아랫동네, 정릉 재개발 구역

by 삼도씨
CYMERA_20220723_155346.jpg [가을에 물든 정릉. 2021]

정릉,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제주에서 올라온 서연의 자취방이 있던 동네로 익숙한 이름이다.

그 정릉을 그림으로 알게 된 지인이 자신의 슈필라움으로 초대를 했다.

영화에서 본 정릉과 지인의 슈필라움이 있는 정릉은 완전 다른 동네 같았는데, 초대받은 곳은 북한산 아랫동네로 재개발 구역이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정릉천에선 어미 오리와 새끼오리들이 한가로이 수영을 하고, 어른들은 물가에 앉아 발을 담근 채 담소를 나누고,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는 곳. 또 징검다리도 있어서 다리를 건너는 엄마와 어린 아들의 풍경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었다.

20220804_233401.jpg [정릉천 워터파크. 2022]

북한산 아랫동네라는 이름에 걸맞게 마을 진입로부터 완만한 경사가 시작되었고, 그 입구 붉은 벽돌의 폐가는 담쟁이넝쿨이 주인이 된 지 오래 같았는데, 그 집은 원래 10. 26 사건의 주인공이 살았다고 한다.

재개발 구역이니 당연히 공가(空家)와 폐가(廢家)는 많았지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보다 생명력이 넘쳤다. 왜냐하면 살짝 눈길만 돌려도 텃밭엔 싱싱한 고추와 가지가, 가을엔 배추와 무가 햇살을 받고 쑥쑥 자란다. 봄부터 겨울까지 마을 중간에 자리 잡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정말 멋지다. 봄엔 나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연한 새순이 삐죽삐죽 나오고, 여름이 되면 초록잎이 빽빽하고, 가을엔 황금빛 은행잎을 뽐내는 데, 은행나무 하나만으로도 가을을 충분히 만끽할 정도다. 겨울이 오면 잎을 다 떨궈낸 가지마다 새들이 쉬어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집집마다 계절의 꽃들이 피고 지고, 빡빡한 서울에서의 고향 같은 푸근함이 있다.

Screenshot_20220804-234118_Instagram.jpg [지인이 슈필라움인 호호정. 2022]

3년 동안 어반스케치를 하러 이곳저곳을 많이도 기웃거렸다. 기웃거렸던 동네마다 남다른 감정을 느낀다. 물론 애착이 가는 동네 중 단연 1순위는 이곳 정릉 재개발 구역이다.

아직 어리바리한 부산 아지매를 기꺼이 초대해 준 지인의 슈필라움도 있고, 그림 그리는 현장에서 첫 선물을 주신(유산균 음료) 5월엔 장미와 은행나무가 너무나 예쁜 파란 대문 집 아저씨, 하늘과 맞닿았다고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멋진 풍광도 있다. "장미가 피었을 때 우리 집이 예뻐요"라고 수줍게 말씀하시며 박카스도 주신 노란 벽화 집 아저씨.

굳이 타임머신이 없어도, 1980년대 서울의 정과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이곳이 오래도록 남았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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