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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그리드 Apr 04. 2024

강.삼단

내 엄마의 이름



모든 행복한 가족들은 
서로서로 닮은 데가 많다.
그러나 모든 불행한 가족은
그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불행하다. 

_톨스토이







엄마는 1948년 전라도 끝 섬에 맞먹는 진도 그 아래에 위치한 자그마한 섬 조도에서 태어났다. 여섯 형제 중 셋째였으며 위로는 언니 둘 그리고 아래로는 여동생 두 명과 맨 마지막 남자형제가 한 명 있다. 엄마의 아빠는 어업에 종사하셨기에 배를 타고 먼바다에 나가 물고기와 어패류를 하루가 멀다 하고 잡아오셨으나 엄마를 비롯한 총 여덟 명의 가족은 항상 배가 고팠다고 한다. 한적한 섬마을 양지바른 시골이었으나 먹고사는 것은 별개로 치열했던 듯하다. 



엄마의 엄마인 나의 외할머니는 성격이 아주 드세셨다. 그 누구보다 정이 많은 분이지만 생계에 있어서는 매섭도록 단호했다고 한다. 모든 자식들이 집안일을 도와야만 했기에 외할머니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일을 거들도록 했다. 본인부터가 몹시도 부지런한 분이셨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계신 시골집에 맡겨져 살던 시절도 있었다. 2~3살 즘 되는 나이였다 한다. 우리 집도 그 당시에 넉넉한 환경이 아니어서 엄마도 쉬지 않고 일을 많이 해야 했다. 어린아이를 돌볼 겨를이 없어 엄마의 친정집에 내가 맡겨졌고, 멀리 떨어지던 그날 아빠가 하염없이 날 붙잡고 참 많이도 우셨다고 엄마에게 들은 적이 있다. 



엄마는 초등학교에 가서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뭐든 할 기세였다 한다. 무척이나 정말이지 매를 맞을 정도로 말려도 공부가 하고 싶어서 몰래몰래 학교에 갔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자애가 무슨 공부냐 하는 깡시골의 관념상,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결국은 초등학교 1년, 2년, 3년도 채 못 다니고 집으로 끌려오다시피 했다 한다. 



엄마는 여전히 그 시절, 그 옛날옛적 공부를 하지 못했던 자신을 몹시도 부끄러워하신다. 다시 태어나면 실컷 공부를 할 것이고, 다음 생에는 반드시 남자로 태어나련다 하며 얘기를 하곤 한다.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어려운 환경에 고된 생활을 해 오면서도 혼자 힘으로 몰래몰래 돈도 벌고 번 돈으로 자신을 꾸미기도 하는 여자였다. 하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던 꿈이 있던 소녀였다.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가수는 못 되어도 무대 위에서 노래해 보고 싶다는 부푼 희망을 갖고 있었고, 성격이 쾌활해서 주변에 엄마를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많다. 



어릴 적 내 엄마를 떠올려보면, 크게 혼낸다거나 소리를 지른다거나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며 강요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여전히 생생한 기억 중 하나는 여름 끝자락 초가을, 아직은 무덥던 간간히 찬 공기도 느껴지던 이른 저녁 식사시간이었는데 엄마가 해준 볶음밥이 기가 막히게 맛있었더랬다. 무척 어렸던 나였지만, 입안에서 갖가지 재료들이 만나 혼합되면서 하나의 맛으로 승화되는 천상의 볶음밥을 경험한 건, 샛 노란 계란프라이가 눈부시도록 빛났던 바로 그 볶음밥 단 한 번이었지 싶다. 그날의 저녁과 냄새는 언제든 금세 떠올려질 정도로 강렬하다. 어린 열 살 안팎의 저학년이었건만 '아. 이게 행복이구나' 싶은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배웠던 순간이었지 싶다. 



모든 게 완벽했던 그날 저녁. 어린 시절 그 속에 내 엄마가, 젊고 고운 우리 엄마가 있었다. 마당과 부엌을 수십 번이고 오가던 엄마가 생생히 떠올려진다. 











어린 시절 젊은 엄마는 요리사가 분명했다. 살살 녹는 카스텔라부터 도넛은 물론 씹는 맛이 일품인 견과류 간식도 엄마표 시그니처 메뉴였다. 배를 타고 가야만 하는 작은 섬에 살던 외할머니가 다녀가신 날에는 우리 가족 모두 배가 부를 정도로 바다음식 잔치였다. 직접 잡은 낚지며 바닷게며 이름 모를 생선들이 즐비했다. 우리 여섯 가족들 맛있게 먹도록 참 많이도 음식, 아니 식량이라 할 정도로 풍족하게 갖다 주셨다. 그리고 엄마는 우리 사 남매들이 커가며 병치레 하나 없도록 건강한 밥상을 언제나, 지금도, 여전히 힘에 부쳐도 차려주신다. 그게 당신의 사는 낙이라고, 행복이라고, 아픈 팔을 잠시도 쉬게 놔두질 않는다. 



엄마 팔 안쪽에는 0.3cm 정도의 귀여운 타투가 하나 있다. 삼선 아디다스 모양이다. 어릴 적 친구들과 숯인가 무엇인가로 여자들만의 의리를 다졌다고 한다. 엄마는 하고자 하면 하는구나 하고 살짝 놀랬었던 것 같다. 



고생. 엄마의 젊은 시절은 고생이 참 많았다. 나의 엄마가 되고 나서도 그 고생은 끊이질 안았다. 아빠를 만났던 스무 살이 갓 넘던 시절. 얼마 안 되어 결혼을 결심했는데 거기에는 분명한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아빠는 엄마가 살던 시골에 새로 온 새내기 선생님이었는데 '어쩌면, 이 사람과 결혼하면 이 지긋지긋한 고생도 끝날 수 있겠다' 싶어 희망과 기대를 안고 결혼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결혼해서 보니, 웬걸. 가난의 가난, 너무도 가난한 집안 거기에 처음 겪어보는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한다. 혹독한 시집에서 맏며느리가 된 엄마는 그 시절을 얘기할 때면 아직도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눈에 눈물이 맺힌다.



어린 내 엄마, 젊은 내 엄마였던 그 강삼단씨는 모질디 모진 세월과 풍파를 견뎌주었다. 내 엄마가 안 되었다면 원하던 꿈을 맘껏 펼치며 자유로이 살고 있을 엄마다. 그렇지만 엄마는 내 엄마가 되었다. 내 엄마임이 이렇게나 고마운걸 나는 겨우 이제야 알아가고 있다. 









_엄마를 기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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