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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Feb 05. 2024

사모님은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마시라

나이 마흔, 코를 박고 충성한 조직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경상도 우리 고향 사투리로 ‘알분시럽다’는 말이 있다.


말을 빨리 배운 아기가 또박또박 자기 생각을 표현하면 어른들이 그랬다. “아이구 알분시럽대이!” 쑥스러워하지도 주눅 들지도 않거니와 논리적인 주장까지 해대는 꼬마라면 이런 소리도 들었다. “요 알분단지를 누가 당하겠노.” 유년 시절 내 별명이 바로 ‘알분단지 차단지’였다. 쉼 없이 질문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 보이는 게 다 궁금한 아이에게 하루해는 늘 ‘넉점 반 넉점 반’ 짧기만 했다.    

 

세상은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커갈수록 나를 야단치는 소리가 있었다. “가시나가 자꾸 나댄다고 사람들 욕하는 걸 왜 모르노! 가만히 좀 있어라.” 학교에서 공부 잘하고 인정받는 내게 엄마는 “여자도 배워야 인간 구실한다”며 좋아하다가도 한숨 섞어 말하곤 했다. “똑똑하면 미움만 받지. 여자는 얌전하고 남편 잘 만나는 게 최고 복이다.” 교회에서는 "여자는 조용하라”고도 했다.


어른이 된 후 알분단지 차단지를 오랜 세월 잊고 살았다. 그렇게 내 목소리를 잊은 줄도 잃어버린 줄도 모르던 어느날 느닷없는 예감이 찾아왔다. 40번째 내 생일이 며칠 지난 2002년 2월 하순이었다.



말 못하고 죽은 귀신   

  

월요일 오후 안산집을 출발해 전철로 종로5가역까지 가는 2시간 동안 나는 참 피곤했다. 모처럼의 서울 콧바람이라는 의미가 무색하게 금방 눈이 감기며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침부터 종종거리긴 했지, 졸면서도 이 잠깐의 쉼을 달콤하게 즐기려 애썼다. 새천년 들어 계속 불화한 단체 분위기를 제대로 들을 기회 아닌가. 잠시 눈 붙이고 맑은 정신으로 대화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저녁 약속 장소인 마당 있는 한옥 앞에 짝꿍 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회의가 오전 오후 종일 이어져 조금 전에야 서둘러 올 수 있었단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참기름 향내며 전 부치는 냄새가 솔솔 났다. 'ㅁ'자 마당을 빙 두른 방마다 툇마루가 이어져있고 댓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지붕 끝 처마에서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방문이 하나 열리며 선교 본부의 목사A가 우리를 맞았다.      


“사모님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     


친절하고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으며 나는 이 식사 자리의 의미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친한 목사 부부들이 만나 밥 먹는 가벼운 자리가 아닐 것이다. 그는 우리보다 거의 20세 연장자에 단체의 최고 리더, 우리를 폴란드에서 한국으로 불러들인 의사결정권자였다. 그와 우리가 함께 마주 앉은 건 6년 전 귀국 당시 이후 처음이었다. 동부인이 아닌 그로 인해 세 사람 식사자리가 새삼 내게 낯설었다.


“어려운 때에 사모님이 애들하고 수고가 많으시죠?”     


그가 애들 이야기를 아이스 브레이킹 인사로 하는 게 나는 달갑지 않았다. 내가 세 아이들과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세 돌 된 막내가 엄마와 얼마나 떨어지기 싫어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큰 애 둘 학교 보내고 이웃 할머니께 막내를 맡기고 대학생 U와 성경공부까지 한 오늘 오전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3학년 두 아이들 기다리며 내가 얼마나 점심을 부리나케 먹었는지, 저녁 챙겨두느라 얼마나 땀 흘린 후 나왔는지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만면에 미소를 띠며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에요. 큰애들이 막내를 워낙 잘 놀아 주니 셋째는 거저 키우는 거 같아요.”

     

그랬다. 나는 ‘은혜로’ 산다고 말하는 사모였다. 내 짝꿍은 소위 복음주의 초교파 국제선교단체의 한 지부를 맡은 책임목사였다. 1961년 박정희 쿠데타와 같은 해 설립된 이 단체의 세계 대표는 큰 행사에서 박정희 같은 군복차림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서열문화가 있었고 ‘성서한국 세계선교’를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를 자부하는 조직이었다. 단체에서 A와 내 짝꿍 간에도 당연히 서열이 있었다. 한정식 밥상이 차려졌다. 두 남자의 대화에 나는 귀를 쫑긋 세우되 목소리 없이 밥을 먹었다.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말라?     


새천년 들어와  단체가 분열 조짐이 있다는 것까진 나도 알고  있었다. 세계 대표의 ‘독재적’ 리더십에 반대하는 쪽과 지지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짝꿍 덕을 통해서도 듣지만  인터넷이 있었기 때문이다. A는 지금 젊은 리더 그룹인 내 짝꿍을 관리하고 있는 셈이었다. 지부들의 분열을 막고 지켜내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지혜롭게, 우리 지부를 잘 지키라지만, 우리 생각이 어떠냐 질문은 없었다. 다만 짝꿍이 그와 한 방향이길 종용 내지 당부하며 마무리하는 느낌이었다.


조용히 듣던 내가 불쑥 질문하고 말았다.      

“그런데 목사님, 단체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길래요? 알아야 한마음으로 동역하죠. 사모님 모임에서도 구체적으론 못 들어서요. 가장 큰 어려움이 뭔지 솔직히 말해 주세요.”     

어색하게 굳은 얼굴이 되며 A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용기가 났을까 내가 다시 말했다.

“사실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도움이 될 거 같아요. 저도 판단할 수 있게요.”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쩝쩝대더니 나를 향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은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마시고 조용히 기도만 하시면 됩니다.”     


낯선 말은 아닌데 낯설었다. 내가 진짜 동역자라면 정보를 공유하는 게 맞지 않나. 서늘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나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음식으로 돌려버렸다. 시금치나물을 집는데 젓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랬다. 바로 며칠 전 마흔 살 생일에 하필 스스로 질문했더랬다. 어지러운 단체사정을 나는 얼마나 아는가, 책임 있는 리더라면 스스로 판단해야 하지 않냐고 말이다.


한 분야에서 20년 정도 일했다면 사회에서는 전문가라 할 텐데, 나는 뭘까. 코를 박고 충성한 조직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란 걸 확인한 기분이었다. 마흔을 누가 불혹이라 했던가. 개소리였다. 나는 심하게 혹하고 있었다. 스스로에 그리고 세상에. 이게 뭐지? 나더러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말라고 한다.     


어릴 적 알분단지 차단지가 그날 밤 와락 생각났다. 말하기 좋아하는 아이, 세상이 궁금한 아이, 가슴에 질문이 가득한 아이와 눈물로 포옹하며 내 마음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진짜 글을 쓰게 되겠구나. 첫 이야기는 ‘말 못하고 죽은 귀신’ 판타지 소설이면 어떨까. 느닷없이 좋은 예감으로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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