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쏟아지던 비가 저녁이 되니 그쳐서 맘 편히 걸어갈 수 있었다. 안산 중앙역 앞 '스페이스 오즈'까지 생각을 정리하며 몸을 풀며 여유 있게 걸었다. 안산여성노동자복지센터에서 주관하는 '돌봄 노동자 노동권익 교육사업' 5주 차, 오늘이 마지막 날, 내가 마지막 강사다. 낯선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걸음엔 언제나 설렘과 긴장이 함께다. 어떻게 한 시간 반 동안 즐겁게 소통하는 수다를 떨까, 상상을 즐기며 갔다.
강의 도입부에서 나를 간략하게, 교수도 전문가도 아니며 자기 몸에 대한 수다를 떨 거라고 말하고 시작했다. 가족력 B형 간염 보유자였다가 간암절제수술받고 내 몸을 내가 접수한 이야긴데, 사람이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 가볍게 들으면 된다고 했다. 쓸만한 게 있으면 건지고 아닌 건 지나쳐 들어도 된다고 말이다. 진심이었다. 내가 하는 걸 너도 꼭 해야해, 그런 맘 없이 편하게 소개하는 정도로 가기로 했다.
"여러분, 오늘이 아주 특별한 날인데 아세요? 10년 전 오늘 제가 어디 있었을까요?"
사람들이 알 리가 없건만 나는 질문했다. 모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사랑스러웠다.
"병원에 있었어요. 2014년 7월 2일 딱 오늘 제가 간암절제수술을 받았거든요."
그랬다. 내게 특별한 오늘 "내 몸은 내가 접수한다"는 제목으로 '몸, 자기 돌봄, 치유'에 대해 강의를 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 만났지만 동네 친구처럼 수다 떨 수 있는 게 우리들이다.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며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 발을 땅에 붙이고 척박한 현실을 헤쳐 나온 생존자들이다. 첫인사도 말 거는 것도 질문도 반응도 정말이지 형식이 없었다. 나를 무장해제시키고 자유롭게 수다 떨게 해 주었다. 내가 가져간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2권과 김두리 센터장이 여노에서 구입해 준비한 2권에 모두 사인해서 선물할 수 있었다.
"간 20% 좌엽절재 개복수술. 4cm."
집에 돌아와 2014년 다이어리를 꺼내 확인해 보았다. 7월 2일(수)자 면에 기록된 내용이 딱 한 줄 뿐이었다. 오후 2시 칸에 적힌 걸 보니 수술 전 오전에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 내 몸이 과연 인간구실할까 싶을 정도로 아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그때 내가 10년 후 이러고 살게 될 줄 상상하지 못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전혀 감이 없었다. 컨베어벨트에 얹어진 물건처럼 병원이 하라는 대로 움직이던 때였다.
내가 얻은 새 몸과 새 삶이 기쁘고 감사해서 신나게 강의할 수 있었다. 강의자료 PPT에 담은 10년 전 오늘의 내 얼굴이 새롭다. 수술 앞두고 안 무서운 척 익살스런 표정으로 인증샷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몇 달 후엔 머리를 싹 밀어버린 사진이 새롭다. 퇴원 후에 암환자들을 위한 제천 요양시설에 있을 때였다. 항암도 방사선도 안 해서 나만 머리숱이 많은 게 싫어서 머리카락 없는 암친구들과 같이 되려고 밀었던 머리다.
돌아와 오늘한 내 강의를 되짚어 보았다. 재미있어하고 살아있는 반응으로 호응해 준 분들이 고맙다. 역시 생생한 내 이야기를 들을 때와 책 영화 곁들일 때의 사람들 눈빛이 달랐던 거 같다. 책 영화 이야기는 줄인다고 했지만 더 줄여도 될 것 같다. 김두리 센터장님 역시 그런 의견이었다. 7월 말에 있을 150명 대상 강의는 훨씬 더 쉽게 발을 땅에 더 붙인 이야기로 보완해 보련다. 하면서 내 강의도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 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