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섯 번째 방> 토론 준비하다가 버지니아 울프와 최승자를 생각하다
영화 <다섯 번째 방>은 익숙한 여성 이야기이자, 바로 나? 묻게 하는 여성 성장 서사로 보았다. 영화 토론 준비로 논제를 만든 후의 여운으로 써 본다. 주인공 효정과 이 영화를 만든 감독 딸이 사랑스럽고도 짠해서다.
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이 새롭게 자신을 보며 새 길을 간다는 건 얼마나 엄청난 혁명인가. 자기 엄마 인생을 반복하지 않으려 영화를 찍었을 딸이 대견하고 아름답다. 효정은 전형적이라 할 만큼 누군가의 딸로 커서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며느리요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았다. 돌봄 제공자로 평생 늙어갈 운명을 어느날부터 거슬러, 진화하고 또 진화해, 자기만의 길을 만들고 있다. 다섯 번째 방,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 결국 독립하는 중년여성이다.
이 멋진 여자의 남편 전성은 반대의 의미에서 너무 전형적이다. 변하지 않는 답답한 중년 남자. 외아들로 나서 부모의 전폭적인 우쭈쭈 돌봄으로 커서 결혼 후엔 아내의 돌봄을 받는 남자로 살았다. 그는 전혀 자라지 않는 성인 아이로 중년이 돼버린 거다. 독립적으로 변해 가는 아내를 이해는 고사하고 지지자도 도움도 못 된다. 아내에게 징징대다 스스로 풀 의지도 능력도 없으니 폭력적이다. 감정노동도 돌봄도 무능하니 딸에게까지 의지한다.
"할아버지는 차와 직장을 아빠에게 해주었고 할머니는 아빠의 편이 돼주며 뒷바라지했다. 아빠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철부지 외동아들일 뿐이었다. 결혼해도 여전히 자신을 책임지지 못하는 아빠는 점점 집에서 짐이 되었다." 이러니 이 남자가 젊은 날 아내를 안고 찍은 푸르른 사진마져도 슬프게 보인다. 귀하다고 돌봄만 받은 사람이 남도 자신도 제대로 돌볼줄 모르는 어른이 되는 게 서글프다. 이어지는 그와 모녀가 주고받는 대사에 감정노동에 무능한, 점점 짐이 되는 중년남자를 보라.
전성: 엄마가 나를 싫어하는데 니가 소통을 좀 시켜 줘야지.
찬영: 나는 해줄 수 없어.
전성: 엄마가 날 별로 안 좋아해 요새. 아빠 안 가. 안 가.
효정: 우리 일을 하고 자야 해.
전성: 안 가. 안 가 안 가 안 가 안 가. 찬영이 니가 할 수 있는 거 같애. 원점으로, 우리를 원점으로 돌려 주세요. 우리 옛날에 사랑했잖아. 아빠도 엄마를 사랑했고 엄마도 아빨 사랑했어. 우린 진짜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해서 너를 낳은 거 아이가.
<다섯 번째 방>을 만든 전찬영 감독은 버지지나 울프에게서 영감을 얻어 자기만의 방을 찾는 엄마를 찍기로 했을 것이다. 공감 백배 영화면서도 남자만 보이면 서글프고 답답하다. 토론 논제를 만들면서, 이런 성인 아이 남편과 계속 살아가는 여성의 현실이 이해되고 화나고 답답하다가 짠하다 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100년 전에 깨달은 걸 21세기 여성들은 발 뒤꿈치 따라가기도 버거운 현실이 뭐냔 말이다.
100년 전의 사람 버지니아 울프는(1882~1941)는 『자기만의 방』(1929)에서 이렇게 썼다.
“한 개인이 최소한의 행복과 자유를 누리려면 연간 500파운드의 고정 수입과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고 아무리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게, 여러분 스스로 충분한 돈을 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성은 그저 이백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죠. 이런 이유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니 최승자는 차라리 "나를 안다고 하지 말라" "너는 나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고 했으리라. 오래 전 블로그 시절에 최승자의 시 '일찌기 나는'을 읽고 썼던 글이 셍각나 긁어다 붙여 본다.
일찌기 나는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난 최승자 시가 세상 멋있고 좋아. 섬뜩하지만 현실 아냐? 4년이 더 지난 이야기지만 어제 일 같이 생각나는 게 있어. 그 때 일 년 이상 우리가 날마다 치열하게 싸우던 시절 말이야. 세상 누구보다 서로 잘 안다 믿었던 우리 두 사람. 그러나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그 미친 깨달음의 날들. 아마도 천지가 다시 창조된 날이었고 내가 나로 다시 태어난 날 아닐까? 어쩌면 너와 내가 알던 우리가 죽어 저 끝없는 우주의 미아가 된 날이겠지.
“이제 더 이상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제일 홀가분해요.
남자한테 설명하다 지쳤어요!”
그 무렵 어느 날이었어. 내 지인 중에 5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 여자가 고백한 이 말 생각나? 내가 만나고 와서 감정이입해가며 너한테 얘기해 줬잖아. 5년 함께 한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그 여자가 느낀 감정 봐. 슬픔도 외로움도 그리움도 아니었어. 그건 해방감이었지.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설명해야 하는 사슬에서 풀려난 해방감. 알거 같지 않아? 젊은 그 여자는 어떻게 그리도 일찍 깨달았을까? 내가 네게 느낀 절망이 바로 그랬다는 거 알지?
“나를 안다고 하지 마! 나는 너를 모른다!”
그날, 내 마음에 번개가 내리친 날. 안개가 걷히고 햇빛이 찬란하게 비친 아침이었어. 나는 기억해. 나를 아는 줄 아는 네가 역겨워 견딜 수 없었어. 아니 나는 너를 모르기로 결심해 버렸어. 그 때 세상이 어찌나 밝아 보이던지! 왜 그토록 알려고, 안다고 고집했을까. 더 이상 나는 너를 알지 않기로 했지. 네가 알던 나도, 내가 알던 나도, 우리도. 더 이상 감히 나를 안다고 하는 자, 내가 견딜 수 없음을 알게 됐어. “누구세요?” “모르겠는데요?”
내 말 뜻을 넌 바로 알아듣진 못했더랬지. 평소 같으면 난 네가 알아들을 수 있게 또 밤을 새워가면서라도 설명했겠지.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나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기로 했지. 너의 이해와 공감을 얻고자, 너의 사랑과 호의를 잃지 않으려, 나를 갈아 넣던 그 짓, 이젠 내가 모르는 일이 되었어. 넌 날 알 수도 없었고 알 의지도 없고 알 능력도 없었어. 그토록 무능하고 무지한데 너는 왜 너를 설명하지 않고도 살 수 있었을까? 나는 왜 나를 끝없이 설명해야 했을까?
가을이 오면 나무는 잎을 떨구고 몸을 가볍게 하지. 긴 겨울을 견디고 새 봄을 준비해야 하니까. 나는 암수술과 갱년기라는 내 삶의 가을을 통과하며 다가올 겨울을 보게 됐어. 가벼워 져야 했어. 내 몸이 싫은 건, 내 마음이 아니라고 하는 건 피하고, 무거운 짐은 벗어야 했지. 내 맘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벗어야 했어. 너는 내게 무엇이었을까? 나는 너를, 우리를, 행복도, 사랑도, 껍데기였다면 다 버리기로 했지. 낙엽 떨구고 앙상한 나목으로 겨울을 살아내는 나무처럼.
이혼해! 너는 너의 길을 가! 나를 더이상 안다고 말하지 마!
똑똑하게도 넌 사태를 비로소 진지하게 알아차리더구나. 그동안 지겹게 설명하고 지겹게 하던 돌봄과 받아줌과 토닥임이 소용없는 짓이었더라. 그 차가운 진실이 네 눈에 확 닿았을까. “내 마음은..... 내 말은.....”, 그딴 설명이 다 무슨 소용이었던가. 대신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마. 함부로 나와 같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니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냐.” 이 분명한 경고가 너를 깨웠지. 난 더 이상 네 인정도 허락도 도움도 사랑조차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널 버리는 게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선택이었지.
네가 버림받을 수 있음을 비로소 알아차리더구나. 그래. 세상 다 버려도 내가 널 버릴 줄은 상상 못했겠지. 나는 언제나 네 마음을 먼저 읽고 배려하고 사랑하고 감싸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동안 너는 이 세상에 없는 나를 안 거야.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나를 원하고 기대한 거야. 그러니 부디 나를 안다고 하지 마. 아니, 그건 네 몫이고, 나는 마음에서 너를 깨끗이 버렸어. 내가 알던 널 나는 죽여버렸어. 니가 내 말을 이해하건 못 하건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어. 너의 세계와 문법과 언어로 나를 규정하고 말하지 마. 날 더 이상 안다고 말하지 마. 그것뿐이야.
일찌기 나는, 최승자, 세상 멋지지 않아?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