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에게 희망을

#참자아로 이끄는 나비이야기

by 닥터파브르
KakaoTalk_20260118_130641555.jpg 우리 집 청개구리를 데리고,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데려온 한 권의 책.

초등학교 시절, 책장 한 귀퉁이에 조용히 꽂혀 있던 『꽃들에게 희망을』은 그때의 나에게 그저 예쁜 그림책이었다. 애벌레가 나오고, 나비가 되고, 하늘을 난다는 단순한 이야기.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다시 펼쳐보니, 그 책은 너무 이르게 내 손에 쥐어졌던 철학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주인공 노란 애벌레 옐로우는 어느 순간,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이렇게 먹고, 자라고, 오르기만 하면 되는 걸까?”


그 질문은 너무 조용해서, 경쟁에 익숙해진 우리는 종종 듣지 못한 채 살아간다. 옐로우가 마주한 애벌레 탑은 낯설지 않다. 더 높은 곳에 답이 있을 거라는 믿음, 정상에 오르면 의미가 주어질 거라는 환상.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성적표로, 직함으로, 매출과 숫자로 탑을 쌓아 올린다. 그리고 그 탑은 언제나 말한다.


“조금만 더.”


검은 애벌레 스트라이프가 끝내 정상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대했던 진실도, 환희도, 완성도 없었다. 오직 바람과 공허만이 남아 있었다. 이 장면 앞에서 나는 자주 멈춰 선다. 우리가 그토록 오르려 했던 정상도, 어쩌면 이런 풍경은 아니었을까 하고.


반대로 옐로우는 내려온다. 내려온다는 선택은 패배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장 용기 있는 결단이다. 남들과 같은 방향을 포기하고, 비교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일. 그리고 혼자만의 고치를 만든다. 고치는 도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가장 격렬한 변화가 일어난다. 나비가 된다는 것은 더 높이 오르는 일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일이다.

꽃들에게 희망을.JPG 고치는 멈춤이 아니라 변화가 시작되는 자리란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나는 자연스레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린다. 나비를 사랑했고, 나비처럼 살았던 사람. 석주명. 우리는 그를 흔히 ‘나비 박사’라 부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는 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없다. 이 사실은 때때로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근거로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질문은 거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과연 박사란 무엇인가. 학위인가, 아니면 삶의 태도인가.


석주명은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나, 식민지 조선의 좁은 교육 틈새를 비집고 과학을 배웠다. 일본의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지만, 그의 진짜 교실은 교단이 아니라 들과 산, 계절이 바뀌는 능선과 풀숲이었다. 그는 매주 채집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섰고, 그렇게 십여 년 동안 한반도를 걸었다. 그가 모은 나비 표본은 75만 점. 숫자로 쓰면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같은 길을 수없이 걷고, 같은 풍경을 다시 보고, 같은 나비를 또다시 마주한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빠른 발견보다 느린 확신을 택한 시간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연구자들은 한반도의 자연을 ‘미지의 보고’처럼 소비했다. 표본은 적었고, 결론은 빨랐다. 날개 색이 조금 다르면 새로운 종이 되었고, 크기가 다르면 또 다른 이름이 붙었다. 학명은 늘어났고, 학술지는 빠르게 채워졌다. 그러나 석주명은 멈춰 서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질문했다.


“이 차이는 정말 다른 종일까, 아니면 하나의 생명이 가진 폭일까.”


그는 나비의 날개 길이를 재고, 무늬의 개수를 세고, 변이를 통계로 정리했다. 같은 종 안에서도 생명은 이렇게 다채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숫자로 증명했다. 그 결과 수백 개의 ‘새로운 종’은 사라졌고, 대신 하나의 종이 더 넓어졌다. 석주명이 지운 것은 이름이었지만, 그가 드러낸 것은 생명의 진실이었다. 844개의 학명이 학계에서 퇴출됐다. 그것은 단순한 정정이 아니라, 제국의 속도에 대한 조용한 반박이었다.


서구 학계에서조차 생물 분류에 통계를 본격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한 교사가, 세계 과학의 시간표보다 앞서 나아간 것이다. 영국 왕립아시아협회가 그의 연구를 영문으로 출판하자고 권유했을 때, 석주명은 이미 한반도의 나비를 세계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박사’라 불렀다. 학위가 아니라 태도로, 직함이 아니라 축적된 시간으로.


『꽃들에게 희망을』속에서 옐로우는 탑을 오르지 않고 고치를 만든다. 석주명 역시 정상 대신 반복을 택했다. 더 빨리 인정받는 길 대신, 더 오래 바라보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애벌레 탑 위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지만, 한반도의 하늘에는 수많은 나비로 흔적을 남겼다. 어쩌면 박사란, 정상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바라본 사람인지도 모른다.


『꽃들에게 희망을』은 결국, 나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높이 오를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정직하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애벌레 탑은 언제나 밖에 있고, 고치는 언제나 안에 있다.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견딜 수 있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일. 그래서 이 이야기는 성장담이기보다 회귀에 가깝다. 잊고 있던 질문으로, 밀어두었던 감각으로, 참자아라 불러도 좋을 어떤 중심으로 돌아가는 길.


나비는 목표가 아니라 결과다. 참자아를 향해 묻고, 멈추고, 기다린 끝에 어느 날 조용히 열리는 문.『꽃들에게 희망을』이 오래도록 남는 이유는 우리에게 더 잘 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한 번쯤, 이렇게 속삭일 뿐이다.


지금의 나는,

정말 나로 살고 있는가.

KakaoTalk_20260111_200807883.jpg 지난 무더운 여름날, 배추흰나비의 작은 알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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