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수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Mar 23. 2021

여기는 벌써 용기 내어 벚꽃이

일상 에세이

요 며칠의 날은 정말 얄밉고 얄궂고 기이하다. 조깅을 하다 보면 어느 특정 거리에는 벌써 벚꽃이 팡팡 열려 있어서 아아 진정 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며칠 동안 아주 쌀쌀하고 추운 바람이 매몰차게 불고 밤과 오전의 기온은 영하로 떨어져서 벌써 두꺼운 외투를 벗어버린 사람들의 등을 한껏 구부리게 만들었다. 저녁에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오들오들 떨며 다녔다.


봄은 이렇게 앓아가며 고통스럽게 온다. 요란을 떨며 소란을 피우며 온통 세상을 시끄럽게 하며 찾아온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사람들은 봄이라는 계절에 무감각해져 금방 왔다가 가버리는 봄에 대해서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겨우내 메말라 있던 딱딱한 땅을 뚫고 어린 새싹이 올라오려니 얼마나 치열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이렇게 찬바람에 떨며 맞이하는 봄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우리가 봄을 좋아하고 기다리는 이유는 용기를 내서 겨울의 딱딱하고 추운 땅을 뚫고 올라와 먼저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보면 나도 희망이라는 것을 가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러다가 곧 봄눈이 나무에서 쏟아져 내릴 것이다. 그런 날에는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 봄은 사람의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계절의 시작인 봄에 깊은 결락을 느끼게 된다. 태동의 불안함과 기대가 작디작은 한 인간의 상상을 훨씬 넘어 버리기에 감당할 수 없는 기분에 매몰되기도 한다. 기이하지만 오로지 봄에만 그런 감정을 느낀다. 그럼에도 나는 봄이 노예가 되기를 기꺼이 허락한다.


기시감보다 더 한 이 깊은 결락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의 봄은 그렇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미 따뜻해진 사람들과 아직 추운 사람들이 지금 한 공간에 공존하고 있다. 오전에 맞이하는 공기는 제대로 산뜻해서 일기예보는 늘 어긋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매일 들리는 로컬 카페에서 커피를 받아오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아직 점포나 가게들이 장사 시작 전이라 모두가 분주할 법도 한데 감염병 시국이라 그런지 그 이전의 오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티브이 속 뉴스에서는 늘 사건사고가 연달아 꼬리를 물고 터지지만 봄은, 벚꽃은 그것과는 무관하게 '이제,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라며 무심하게 올라와 꽃을 피운다.


휴대폰 매장을 지나가면 늘 엇비슷한 가요가 흘러나온다. 거의 매일 들리는 노래는 스탠딩 에그의 노래다. 이제 봄의 길목에 접어들었으니 장범준의 노래도 계속 나온다. 생각해보면 오래전에는 길거리에 레코드샵이 있어서 레코드샵이 문을 열면 늘 그 앞의 스피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는데 요즘에는 휴대폰을 판매하는 매장에서 늘 크게 노래가 나온다. 그래서 휴대폰 파는 가게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길거리를 지나가면 온갖 다른 노래가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나와서 한국 노래이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기묘함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 사이에서도 봄은 여기저기 들어와 있다.

황사와 미세먼지 때문에 봄의 나날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며칠은 기온이 낮아서 그런지 하늘에 가스층이 걷혀 꽤나 맑고 푸른 하늘의 모습을   있다. 조깅코스 벤치에 누워서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이 파랑으로 물들어 그림 속에 내가 속해 있는 기분이 든다.  아저씨처럼 붓으로 툭툭 쳐서 구름을 표현하고 붓의 반대 끝으로 하얀 달을  찍어서 표현해본다.


아직 하늘과 강은 차디찬 겨울과 같지만 무심하게 용기를 내어 꽃을 피워 색채를 돋보인다. 용기를 내는 건 언제나 어렵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야 할 때는 반드시 내야 한다. 반드시 내야 할 때 나와야 하는 용기를 봄이면 꽃들이 가장 먼저 보여준다.


해가 길어져 조깅을 하러 나오면 해넘이를 매일 볼 수 있다. 해 주위는 온통 오메가 빛으로 달에게 하루를 반납하기 싫어서 짜증을 내는 것 같다. 하지만 해는 변하지 않은 사실을 받아들이고 달에게 하루를 부탁한다. 그 순간 해는 순식간에 서산 너머로 잠이 들고 세상은 달이 빼꼼 내려다본다.


해가 붉게 물들며 서산으로 넘어갈 때는 황홀하다. 황홀하다는 표현 외에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겠다. 이적의 노래처럼 두 다리가 다 녹아 없어진대도 저곳에 뛰어들어 산산이 사라지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해가 하늘에서 서산으로 떨어지는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잠깐 서서 바라보고 있으면 '안녕'을 고한다.


강변을 따라 죽 조깅을 하고 도로로 올라와 돌아오다 보면 이렇게 성미 급한 벚꽃은 이미 팡팡 열려 있다. 그러면 고개를 꺾어서 한참 쳐다본다. 이렇게 두발로 딱 서서 한 곳을 집중해서 보고 있으면 옆에서 따라보는 사람이 있다. 그리곤 곧 흥미가 떨어진 고양이처럼 가버린다. 그래도 한참 서서 벚꽃을 본다. 도대체 이 성미 급한 벚꽃은 어째서 이렇게나 벌써 피어서 사람을 아프게 할까.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시작하는 노래가 봄의 기적을 말한다. 벌어진 틈으로 미약한 숨을 쉬며 노래는 다시 찾은 봄의 기적을 믿는다고 말한다. 마음은 겨우내 찬 공기가 머물렀던 그곳에 앉아서 나올 생각을 않는데 봄의 기적은 투박하게 마음을 또 어루만진다. 마음은 천천히 녹으며 봄을 공들여 느낀다. 생명이 태동하는 봄인데 봄이 되면 이렇게 미칠 것 같은 감정에 휘말린다. 노래는 말한다. 긴 잠에서 깨어 새가 노래하듯 다시 난 살아갈 수 있다고, 눈물이 날지 몰랐던 걸까, 아픔을 견뎌온 날들,라고. 그리고 다시 찾은 봄의 기적을 믿는다고. 봄이 되면 슬픔도 아스라이 겨울의 차가운 그늘에 두고 오면 될 텐데 새로 솟아나는 새싹과 함께 슬픔도 같이 온다. 그래서 어쩌면 봄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봄은 가을보다 확실하게 잔인하다. 티에스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어째서 그런 시구를 적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니 얼마나 잔인한 계절인가. 그 중심에 4월이 있으니 티에스 엘리엇의 눈에는 몹시도 잔인했기에 오히려 겨울이 따뜻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는데 온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물들어가니 미칠 지경이다. 변해가는 계절에 시장통의 길고양이도 아직 준비가 안됐는지 그저 어떤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인다.


"안녕, 인간? 우리 같이 봄을 맞이할까?"




매거진의 이전글 맛있는 음식을 조금 먹을 수 있다는 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