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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ug 31. 2021

최 흑 오 18

단편 소설


18.


 버스에 앉아서 2분쯤 지나니 버스의 냄새가 올라왔다. 검붉은 색의 가죽 시트에 상처가 가득했다. 날카로운 것으로 찢어 놓거나 손으로 뜯어 놓았다. 상처는 상처를 그대로 드러낸 채 사람들을 맞이했다. 가죽시트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제공했다. 나는 손으로 그 상처를 만지려다가 그대로 있었다. 그녀가 떠올랐다. 가끔씩 신고 나오는 하이힐과 나의 팔짱을 끼고 걸었던 거리와 때로 얼굴을 찡그리는 표정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건 내가 만들어낸 기억의 허상일지도 모른다. 손님들 앞에서 마네킹의 미소를 보이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 하는 것에서 오는 비틀어짐이 마음의 한 구석에서 모래성을 쌓았을지도 몰랐다.


 기억이 나야 하는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만들어낸 기억은 그것을 생생하게 재생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응이 토착화되어 있지 않아서 반응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지 못할 때도 있고 생각보다 앞서 말하거나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되도록 중의적인 말을 찾으려고 했고 될 수 있으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럴수록 나의 방호벽은 점점 두터워졌고, 그럴수록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다.    


 쥐들은 그런 나를 찾아서 왔다. 그리고 나는 그런 쥐들을 피해서 떠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최흑오라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쥐들이 한 일이 아니라 어쩌면 방호벽 안의 내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어쩌면 더 피하려 하고 있다. 편하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몹시 외로워서 더한 외로움의 껍질을 덮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녀를 깊게 사랑할수록 나의 외로움은 깊어지는 사랑만큼 커져가는 것이다. 외로움의 발로는 사랑에서의 시작이었다. 학습을 해 본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기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방호벽만큼은 단단하게 만들어 버렸다. 양의적인 의식은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그을음처럼 완전히 사라지지 못하고 기억의 주위에서 떠돌아다니며 기억을 하나씩 지우는 것이다.


 버스가 영덕 전의 영해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거기서 내렸다. 아주 작은 터미널이었다. 레인 시즌이라 날은 맑지 않고 비는 소강상태였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마을을 걸었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흐렸고 먹구름은 하늘에서 영역을 만들며 이동을 하고 있었다. 배가 고팠지만 무엇인가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내장탕 집으로 들어가서 내장탕을 주문했다. 더운 날임에도 덥지 않았고 외롭다는 생각이 강해서인지 한기가 들어 내장탕 집 문을 드르륵 열었다. 이 집만이 오직 아침식사가 된다고 적혀 있었다. 주문하고 몇 분쯤 지나니 벌건 국물의 내장탕이 조미료의 냄새를 내며 앞에 놓였다. 막상 내장탕이 나오니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숟가락으로 몇 번 휘저은 다음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고는 계산을 하고 그대로 나왔다.


 포구를 거닐다 숙소를 찾아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모텔이었다. 항구가 보였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는 방이었다. 모텔은 모텔만의 냄새가 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비슷한 책상과 생활용품이 테이블 위에 있고 거울이 있고 티브이가 있고 욕실이 있다. 침대가 있고 바닥이 보이고 콘돔이 보였다. 나는 씻을 생각도 없이 그대로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오후 5시가 넘었다. 이런 시간에 일어나는 것도, 이렇게 낮잠을 오래 잔 것도 처음이었다. 창문으로 보니 아직 날은 아침처럼 그대로 흐린 상태였다. 바다의 냄새가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침대에 구부정하게 앉아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일어나서 또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 속에 사람은 소거되어 있었다. 10분 정도 그림처럼 보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수순처럼 들어갔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여자를 불러 줄 수 있냐고 하니 주인은 그렇다고 했다. 여자는 손톱의 매니큐어가 벗겨진 30대 중반의 여자로 검은 블라우스와 자주 빛의 타이트한 여름용 치마를 입었다. 손톱의 벗겨진 매니큐어를 보니 갑자기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합의를 봤다. 여자는 입으로 해주는 대신 오만 원을 더 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여자는 빨랐다. 나의 바지를 내리고 침대에 앉힌 다음 무릎을 꿇고 한 손으로 나의 허벅지 안쪽을 잡고 한 손으로 만져주고 어느 정도 커졌을 때 입으로 잘 빨아 주었다.


 그녀와의 섹스가 떠올랐다. 처음 그녀와 잠을 잤던 때가 생각났다. 작은 여인숙 같은 곳이었다. 모임에서 빠져나와 둘이서만 앉아서 소주를 마시고 실컷 취했다. 그녀는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술을 많이 마셨지만 들고나간 고가의 카메라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정신은 그런대로 말짱했다. 그날 하룻밤 만에 카메라로 그녀의 사진을 몇 기가바이트나 담았다. 주로 얼굴을, 주로 신비로운 눈동자 위주로 사진을 담았다. “소세계가 있어”라는 말도 술을 마시고 하니 꽤 낭만적으로 들렸다. 같이 찍은 사진도 있고 그녀가 술잔을 기울이는 사진도 있었지만 포커스는 그녀의 눈동자에 맞춰져 있었다. 그날 이후 그녀의 사진을 대량으로 찍은 적은 없었다. 그녀의 사진들이 저장되어 있는 USB 3개를 다 들고 나왔다. 나는 이것을 이곳에 버리기로 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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