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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n 27. 2022

바람이 불어오면 1

소설

1.



 그녀에게는 은은한 비누향이 번졌다. 그 향이 좋아서 나는 그녀의 곁에 고여 있는 물이 되고 싶었다.


 바람은 도륙된 하얀 잎도 휩쓸고 가버렸다. 바람은 죽어버린 마음까지도 몽땅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수평적 구도를 가지는 것들이 바람을 잡고 수직 하는 구도가 된다.



 수업을 마치면 나는 자취방으로 빠르게 왔다. 아이들에게서 나의 걸음이 빠르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하지만 비가 와서 빨리 걸어왔을 뿐이다. 몸에 묻은 계절의 빗방울을 털지도 않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맥주를 한 캔 빠르게 마셨다. 맥주가 몸속으로 퍼져 들어가는 느낌이 기분을 좋게 만든다. 마신 캔을 구석으로 던졌다. 쓰레기통에는 맥주 캔이 탑처럼 쌓여 던진 캔은 쓰레기통 밖으로 튕겨 나왔다. 캔을 던져 바닥에 닿는 소리가 좋다. 평소에는 들을 수 없는 소리다. 찌그러지는 소리가 찌꺼기로 가득한 영혼을 가득 울렸다.


 자취방은 자취촌에서도 제일 작은방으로 버릴 수도 없는 침대 하나에 옷장이 하나뿐인 그런 방이었다. 나는 이런 곳에서도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에 매일 놀라고 있었다. 생활이라고 해봐야 겨우 잠을 자고 잠이 깨면 일어나서 학교에 가는 단순한 반복이 전부였다. 목욕은 목욕탕에서, 식사는 학교 구내식당을 애용했다. 옷장에 옷은 몇 벌 없었고 옷이 놓일 자리에 책이 몇 권 누워있었고 방바닥에도 책이 여러 권 굴러다닐 뿐이었다. 귄터 그라스의 책 3권이 있었고, 김승옥의 단편집과 조지 오웰의 1984, 뒤팽을 탄생시킨 에드가 알렌 포의 소설과 헤밍웨이의 책이 방 안에 굴러다녔다.


 “넌 한국 소설은 잘 읽지 않는구나.”


 그녀와 좀 친해진 다음에 들은 말이었다. 그녀를 보면 김승옥의 단편 중에 ‘차나 한 잔’에 나오는 주인공 ‘이 형’이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에 끔찍이 사랑하는 아내를 때리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드는데, 거기의 아내가 떠올랐다. 꿈을 자주 꾸지 않는데 꿈을 꾸면 꿈속에서 ‘이 형’ 나타났다. 다른 신문사에 만화를 팔아먹을까? 나에게 물었다. 나는 결과를 알고 있기에 그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왜 넌 웃기만 하냐고? 웃음기 걷힌 얼굴의 ‘이 형’이 나에게 말했다. 그의 모습은 내내 아슬아슬하고 불안했다. 그러면서도 ‘이 형’은 유머를 잃지 않았다.


 방에는 건축 도감의 책도 몇 권 있었다. 안도 다다오의 책과 꼬르뷔지에, 안토니오 가우디의 책도 있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있고 선배에게서 빌린 것도 있었다. 수업을 마치면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집으로 와서 침대에 벌렁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허리가 아플 때쯤 일어나서 맥주를 한 캔 마셨다. 누워서 다 마신 캔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맥주를 혓바닥을 내밀어 받아 마셨다. 혓바닥에 닿는 느낌이 좋다. 방울이 떨어지는 속도가 줄어들수록 진실은 빈약해졌다. 캔 속에서 맥주의 피까지 빨아먹은 다음 누워서 아무것도 생각지 않았다. 아니, 생각이 흐르는 대로 생각을 했다. 적극적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또 허리가 아플 때 일어나서 노래를 틀었다. 더블테크의 카세트테이프가 돌아갔다.


 제니퍼 원스다. 그녀의 노래가 좋다. 그래 봐야 한곡이다. 노래를 들으며 책을 조금 읽었다. 딱 지금까지가 나의 불행이 결손 되는 순간이었다. 읽고 있는 소설은 50년대 격동기를 겪은 후퇴한 시대의 한국 소설이었다.


 그들은(주인공과 주인공을 둘러싼) 통영의 작은 어촌마을에 안착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누군가 마을에 들어오고 나서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사는 일이 하나둘씩 발생한다. 외지의 누군가가 사건의 의심을 받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은 마을에 방학 때마다 찾아오는 서울에 사는 이장의 사촌 조카(여, 17세)가 집에 놔둔 일안식 고급 카메라가 없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그 카메라의 행방을 찾으면서 서로 간의 의심이 부풀어가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기심이 그려진다. 그런 내용의 소설이었다. 추리소설 같기도 한데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그리는 소설이었다.


 계절의 비가 내리는 소리는 지붕이나 어딘가에 떨어져 묘한 운율을 만들어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반복적으로 들리는 소리는 나를 몹시 우울하게 만들었다. 우울한 세계는 만져질 것 같았지만 도저히 만져지지 않는 무지개와 비슷했다. 저기에 가기만 하면 있을 것 같은데 가면 아무것도 없는, 나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었다. 결락이 몸을 덮쳐 신발 앞꿈치로 땅을 계속 팠다. 바로 그때 자취방의 문이 열리면서 나는 선배에게 두들겨 잡혀가듯이 맥없이 끌려 선배의 자취방으로 갔다.


 선배는 밥을 하면 으레 나에게 찾아와 나를 끌고 가서 밥을 먹였다. 나의 어떤 부분이 선배에게 그런 동정심 비슷한 것을 유발했는지 모른다. 선배의 집에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분위기였다. 내가 좋아할 수 없는 흐름이 있었다. 시끄럽고 대답하기 싫은 질문만 하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그들은 그렇지만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다. 집을 떠나 대학가에서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만의 유대가 선배의 집에서는 이루어졌다. 건축과의 자취생들, 옆 자취방의 의상과 여학생들, 모두가 모여 저녁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다.


 저 이야기들만 끌어 모아서 글을 써도 중편 소설 한 권은 충분히 나올 것이다. 사람들은 청춘이라는 것을 과시하듯 끊임없이 토론을 했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절대 멈추면 안 되는 내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애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거기에 어울리지 못하는 축에 내가 껴 있었다. 이렇게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는 밥이 어떻게 몸속으로 넘어가는지 조차 알 수 없는 나는 선배에게 이끌려 선배의 방에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곤 했다. 식탁이 좁아서 밥상을 붙여서 모두가 둘러앉아서 밥을 먹었다. 마치 집들이를 하는 것처럼. 분명 싸구려 학교 식당에 비해서 맛은 좋았지만 나에게는 그 맛있는 맛이 나지 않았다.


 나는 교내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게 좋았다. 식당은 굉장히 컸고 볕이 드는 곳이나 구석진 곳에 앉아서 혼자서 밥을 먹고 있으면 덜 불안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있어서 그것을 들으며 밥을 먹었다. 라디오는 주파수가 팝이 나오는 프로그램에 맞춰있어서 팝송을 들을 수 있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스카보로가 나오기도 하고, 본 조비의 네버 세이 굿 바이가 나오기도 했다. 학교 식당에서 내가 자주 먹는 건 국수였다. 멸치국수. 맛이 좋다거나 특별한 맛이 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멸치를 우려낸 물에 소면이 담겨 있고 고명으로 김가루와 썰린 어묵이 전부다. 거기에 테이블에 있는 양념간장을 넣어서 먹었다. 썩 맛이 나지 않아서 좋다. 국수는 국수 정도의 맛이 나는 것이 좋다. 국수에서 고기 맛이 나고 라면 맛이 나는 건 별로였다. 국수를 후룩 먹고 인스턴트커피를 마시며 식당에서 밥을 먹는 학생들을 둘러보는 것도 좋았다. 학교 식당에서 혼자서 밥을 먹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신발 밑장처럼 보였다.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절대 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혼자라는 건 그런 것이다. 물론 안 그런 아이들도 있겠지만 혼자서 자주 점심을 먹는 아이들은 후에 사회에 나가서도 이런 분위기가 이어질 것이다.


 식당에서 나오면 볕이 좋은 곳을 골라 앉아서 노래를 들었다. 심플리 레드의 노래를 들었다. 머리가 빨강이라 아마도 심플리 레드일 것이다. 건축과에는 매일매일 술자리가 있었다. 저녁을 먹지 않은 날에는 그 많은 술자리 중에 한 자리에 껴서 겸사겸사 저녁을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건축과 학생들이 선배의 선배의 선배 선배 때부터 자주 가는 단골 통닭집이 있었다. 우리는 치킨을 치킨이라 부르지 않았다. 통닭이라 불렀다. 건축과 학생들은 늘 그곳에서 모임을 가졌다. 기름에 튀긴 닭이 고작이었지만 참 맛있게도 먹었다. 일주일에 몇 번씩 갔지만 질리지 않았다. 하지만 술이 취하면 학생들은 닭에는 손대지 않는 묘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통닭은 야금야금 먹다 보면 배가 부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저녁도 해결하고 술도 해결하는 밤이 많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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