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Jul 15. 2022

바람이 불어오면 19

소설


19.


 선배는 이반이다. 사랑하는 또 다른 이반이 있다. 내 손은 땀 때문에 한 없이 축축해졌다. 기도가 끝나고 우리들은 조용히 식사를 했다. 손을 잡고 기도를 하는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로 선배는 밥을 먹을 때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선배는 휴학 과정을 밟았고 다음 주면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의상에 관한 책과 그것에 관련된 잡지책을 들여다봤으며 재봉틀 앞에 앉아서 박음질을 열심히 했고 스케치북에 자신만의 의상 디자인을 완성시켜 나갔다.


 모두가 비슷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춘수의 ‘촛불’에서처럼 촛불의 밑 부분이 어둡다는 것은 느끼지 못한다. 그녀와 선배 사이에서도 미저러블 한 기류가 있었지만 겉으로는 잘 구워진 만두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다정하게 보여서 되려 나는 더 무력감을 등에 짊어지고 태어났는데 거기에 더 한 무게가 한 꺼풀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선배와 그녀는 나에게 집으로 가는 기간을 일주일만 미뤄 달라고 했다. 선배가 입대를 하고 나면 나도 집으로 갈 요량이었기에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해 이른 눈이 엄청나게 내렸다. 새벽에 전조도 없이 화가 난 신이 계절을 앞당겨 격분하여 눈을 마구마구 만들어서 세상에서 뿌리는 것처럼 상당한 양의 눈이 내렸다. 가을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퍼부었다. 방안에 외풍이 심해서 전기히터를 켜놓았지만 겨울 야상을 껴입고 두꺼운 담요를 덮어야만 잠들 수 있었다. 잠들기 전까지 손을 후후 불어가며 책을 읽었다. 에릭 클랩튼의 기타 연주가 있었다면 조금은 추위를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입에서는 입김이 과하게 나와서 나는 놀랐고 그만큼 방안은 추웠다. 나는 반쯤 남아있는 소주를 들이켰다. 소주의 향이 달아나서 맛이 조금 이상했지만 마실만 했다. 그래도 꼴에 술이라도 속으로 들어가니 알코올이 전해주는 따뜻함이 속에서 느껴졌다. 전기히터는 분명히 자취방의 전기세만 엄청 잡아먹고 제 역할을 조금도 하지 못하는 축에 속하는 고물이었다. 그럼에도 이것이 지금 내 손아귀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벌떡 일어나서 허리를 굽혀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전기히터 님이시요, 정말 고맙습니다. 실존을 알게 해 준 하이데거보다 더 고맙습니다. 하느님보다 더, 이렇게 추운 방에서 추위를 견디게 해 주셔서...’


 추위를 탄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다. 추위 때문에 오는 고통을 살아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나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른 채 수마에게 정신을 빼앗겼지만 새벽에 몸이 너무 추워서 눈을 뜨고 일어나야만 했다. 전기히터는 꺼져있었고 침대에 걸터앉아서 숨을 쉬다 보니 입김이 담배연기만큼 뿜어져 나왔다. 나는 현실감이 떨어지는 방 안에서 입김을 한참이나 바라보며 입김을 계속 불었다. 하. 하. 후. 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나는 모든 것을 잠시 잊고 그 순간은 신기한 동물을 발견한 것처럼 시간을 들여 입김을 불었다. 고르지 않은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은 방 안으로 뿌려졌고 곧이어 사라졌다. 입김은 마음속에 숨어있는 부끄러운 에고처럼 모습을 드러냈다가 아는 척 당하니 이내 사라지는 수줍은 모습 같았다. 꺼진 전기히터는 아무리 재가동을 해도 꿈쩍도 않는 매머드와 같았다. 전기 스파크도 일지 않았다. 그대로 자신의 소명을 다 한 것처럼 보였다. 힘들고 지쳐 보였다. 앉은 채 창문을 보니 하늘에서 무엇인가 나풀거리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닫혀있는 창밖으로 실루엣이 필름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비는 아니었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저건 눈이었다. 창문을 열기 위해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이 고철 덩어리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기름칠을 하지 않아서 굳어버린 양철 인간 같았다. 도로시가 있다면 기름칠을 해 줄 텐데. 나는 양손을 모으고 그 모은 손바닥을 호호 불며 겨우 일어났다. 거칠고 지친 소리가 났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처음 내리는 눈이었다. 때 이른 눈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눈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떨어지는 속도가 대단했다. 초속 5센티미터보다 훨씬 빨랐다. 비에 불어난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흐름처럼 속도감 있게 눈은 낙하했다. 물처럼 떨어지는 눈을 나는 오래도록 지켜봤다. 계절을 잡아당겨 내려온 눈은 새벽 내내 내려서 발자국을 만들어 낼 만큼 쌓이기 시작했다.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알리는 신호였다. 이제 길고 긴 추운 나날들이 지속될 것이다.


 그녀는 눈이 내리고 있다는 것을 지금 알고 있을까.


 가장 먼저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고독했다. 그리고 외로웠다. 다른 사람보다 그녀가 나는 필요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외로워서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를 사랑하고 나서 고독이 눈처럼 나에게 내렸다. 그녀는 긴 겨울 동안 자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나는 옷을 추스르고 윗몸일으키기를 50회 하고, 팔 굽혀 펴기를 10회씩 4회를 나눠서 한 다음 앉았다 일어나기를 30회씩 세 번을 했다. 그것을 총체적으로 번갈아가며 두 번씩 반복했다. 몸에서 열기가 났다.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몸을 움직여 본 적이 없기에 처음에는 천천히 몸을 깨운 다음 서서히 두 번째 파트에 몰입하고, 세 번째 파트 때에는 좀 더 집중해서 힘을 가했다. 그렇게 몸을 움직였다. 어느 정도 몸 안에서 추위를 밀어냈다. 나는 침대의 이불을 정리한다든가, 제시간에 밥을 해서 먹는다든가, 가방은 언제나 놔두는 자리에 둔다든가 하는 반 자동적인 무의식의 행동이 남들만큼 뛰어나지 못했다. 그런 부분은 내가 타인에 비해서 모자라는 것인지 어떤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적어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숲’에서 그녀와 만난 이후 그녀가 나를 데리러 나의 방에 다시 한번 왔을 때 나는 침대 위에서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보다가 그녀와 함께 선배의 방으로 건너가려고 일어나서 구겨진 침대의 이부자리를 그대로 두고 나오는 것을 본 그녀가 탁탁 펴서 정돈을 해주며, 그냥 나오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고 나는 언제나 그렇다, 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취방에서 나오면서 그녀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여자들이 거울을 보는 것처럼, 팬티를 먼저 입고 브라를 채우는 것처럼, 밥을 먼저 뜨고 반찬을 입에 넣는 것처럼 감각이 시켜서 하는 반자동 유기체적인 행위가 있다고 했다. 그러한 행위는 반면에 런 어웨이를 할 때 모델들이 무대 위에서 팔다리를 내미는 순서를 일일이 인지하지 않지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라 했다.


 “누구나 아침에 일어나면 계획하진 않지만 매일매일 자동적으로 무의식을 통한 행위를 하게 되는 거야. 이불을 게는 것도 그런 의미야”라고 그녀가 말했고 난 잘 모르겠다고 했다. “기이한 사람”이라며 환하게 웃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이 오는 새벽에 자취방을 나오면서 침대의 이부자리를 조금 정리했다. 이불을 쫙 펴서 침대 끝과 맞도록 해 놓았다. 이부자리의 끝에 그녀가 묻어 있었다. 그녀가 그곳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침대의 이부자리 하나가 정리되자 방안의 모든 것이 정리가 된 기분이 들었다. 몸을 많이 움직인 상태에서 숨을 쉬니 입김이 방안에 이질적으로 퍼져 나왔다가 사라졌다.


 마당과 자취촌의 길바닥은 새하얗게 눈으로 덮여있었다. 나는 첫눈이 내린 마당에 첫 발을 내디뎠다. 밟은 곳은 발자국이 생겨났고 내가 걸어온 징검다리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처녀성을 지니고 있는 여성의 몸을 탐닉할 때처럼 나는 조심조심 천천히 눈길을 걸었다. 내가 만들어 놓은 발자국 위에 눈이 다시 내려 조금씩 쌓였다. 그 모습을 보느라 눈이 내 어깨와 머리 위에도 내려와 체온을 떨어트리고 있다는 사실도 까먹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하늘에서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가늘게 눈을 뜨고 하늘에서 눈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집 밖으로 나와서 보는 눈은 창을 통해서 볼 때보다 훨씬 눈 다웠다. 속도감 있게 떨어졌고 서정적이지는 않았다. 눈이 떨어져 내려 얼굴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곧바로 녹아내려 얼굴을 차갑게 만들어서 무릇 내가 여기에 서 있구나, 내가 눈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얼굴에 닿은 눈이 녹는 느낌은 내 속에 있는 어떤 감정들은 무화시켰다. 아직 공기는 깨끗했고 하늘은 어두운 암갈색이었다. 어두운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려오는 것 또한 비현실적이었다. 현실을 현실로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현실 속에 살면서 나는 어쩌면 돈키호테 같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를 언제나 옆에서 지켜줄 수 있을 거라는 착각.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바람이 불어오면 1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