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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Jul 31. 2022

바람이 불어오면 35

소설


35.


 ‘아주 오래된 세월이 흘러야 그 골은 다른 무엇으로 메꿔질 수 있어요. 이별은 슬픈 것이 아니에요. 이별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별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느끼는 가장 큰 위안이다’


 나는 이 말을 그녀에게 해주려고 했지만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나는 내 손수건을 꺼내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나중에 버리지 말고 돌려주세요”라면서.


 나는 그녀가 울게 내버려 두고 칼국수를 마저 먹었다. 칼국수는 식지도 않았다. 아마 식으면 몹시 짤 것이다. 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뭐가 사는지 모르는 것처럼 그녀가 앞에서 울고 있어도 칼국수를 후루루룩 먹었다. 그런 나를 보더니 주인장이 주방에서 나와서 여자를 울린 못난 놈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칼국수에서 버려진 시간의, 오래된 초지의 맛이 났다.


 그녀는 펑펑 울었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소리를 죽이지도 못하고 그녀는 울었다.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바닥으로, 칼국수의 그릇으로, 테이블로 떨어졌다. 세상은 거대한 국그릇 인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보글보글 끓여지는 하나의 양념이었다가 숟가락에 의해서 없어지는 하나의 무기적 간일 뿐이고 그 속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온도를 견기지 못하고 우리는 무서움에 떨고 있는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그녀와 나는 어스름한 밤이 올 때까지 그 마을의 방파제에 가서 바다를 실컷 보았다. 바다는 여름과 달리 고요했다. 해가 빠르게 바다 저 멀리서 떨어졌다. 바닷가의 밤은 온도를 순식간에 잠식했다. 바다의 밤하늘이 무기질처럼 어수선하게 보였다. 오늘 밤에는 바람이 많이 불 것이라고 칼국수 집에 틀어놓은 티브이의 지방 뉴스에서 알려주었다.


 “얼마 전에 영화를 하나 봤어. 크리스마스에 관한 이야기였어. 주인공 이름이 오기야. 오기 렌. 오기는 미국의 브루클린에서 담뱃가게를 해. 오기가 친구인 소설가에게 자신이 겪은 오래전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어. 오기가 1972년, 아주 젊었을 적에 잡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 하루는 일하는 가게에 아직 스무 살이 안 된 흑인이 도둑질을 하고 도망쳤어. 오기는 바로 소리를 지르며 따라갔어, 흑인은 사력을 다해 도망을 갔어,. 흑인은 살이 쪄서 잘 달리지도 못할 것 같았는데 도망을 잘 가는 거야. 흑인들은 왜 있잖아, 부유층을 제외하면 먹는 음식이 전부 튀긴 음식이거나 정크 푸드니까 살이 많이 찌잖아. 아마 도둑질을 한 것을 보면 그 흑인 소년도 생활이 어려웠겠지.


 흑인 소년이 도망가면서 뒷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길거리에 떨어트린 거야. 오기는 흑인을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지갑을 주워 들었어. 오기가 가게로 돌아와서 지갑을 열어보니 돈은 하나도 없고 낡은 사진이 두 장 꽂혀 있었어. 사진 속에는 흑인 소년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적에 트로피를 받아서 찍은 사진과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어. 신분증을 보고 오기는 흑인 소년의 이름이 굿윈이라는 것도 알았고 주소도 알았어.


 처음에는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크리스마스가 된 거야. 이브가 지나갔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그날도 아무 약속도 없었던 오기는 좋은 일 한 번 해보자 하며 굿윈의 지갑을 돌려주기로 해. 그래서 옷을 입고 지갑을 돌려주려고 굿윈의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어. 로버트 굿윈의 집에서 나온 사람은 로버트의 할머니였어. 할머니는 나이가 90세쯤 되어 보였지. 할머니는 문을 열고 오기를 보면서도 “로버트냐, 이 애슬 할미에게 네가 크리스마스라고 와 주었구나”라며 오기를 안으려고 해. 그때 오기는 자신이 로버트가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고 애슬 할머니를 안아 줘. 할머니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거든. 할머니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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