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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ug 02. 2022

바람이 불어오면 37

소설


37.


 우리는 늦은 밤에야 버스에 얼어버린 몸을 실었다.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와 열기로 둘 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깨에 그녀의 머리가 닿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뜨니 그녀의 머리가 내 어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는 엉덩이를 그녀의 옆으로 옮겼다. 발을 잡아당기는 눈밭으로 걸어 다니느라 피곤해서 정신의 핵은 은하수 저편으로 깜빡였다. 내 엉덩이를 그녀의 엉덩이에 바짝 붙이고 그녀가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도록 했다. 모든 걸 버리고 차가워진 작은 손이 그녀의 허벅지 위에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참 작은 손이었다.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나는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내 손 안에서 움직였다. 그녀의 손은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고 있었다. 그녀는 깨어 있을 때에도 깨어 있는 것이 아니고 잠이 들어도 잠든 것이 아니었다. 몸에는 커다란 공백이 생겨버려서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고 공백은 시간을 들여 점점 커져만 갔다. 그녀는 자신을 고 공백 속으로 자꾸 밀어 넣고 있었다. 버스 안은 고요했고 히터의 뜨겁고 더러운 열기에 내 손바닥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직도 손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버스의 정면이 꿈처럼 뭉그러졌다.


 꿈이 없다, 꿈이 없다, 꿈은 하나의 연기였다가 바람에 날려 여러 개로 흩어졌다. 바람은 어디서 오는가, 밑동이 잘린 나무는 가지를 뻗치려 해도 꿈이 자라지 않았다. 꿈아, 꿈아, 어디에 있니.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여전히 내 어깨 위에 머리를 대고 잠들어 있었다. 손은 내 손에서 빠져나와 허벅지 위에 곱게 오므려져 있었다. 나는 소중한 것을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손을 다시 덥석 붙잡았다. 그녀의 손도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녀는 여전히 잠이 들어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떠났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돌아왔다. 같은 길, 같은 상황에서도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버스 속에서도 그녀의 시간은 차가운 봄에 얼음이 녹듯 서서히 흘렀고 나의 시간은 물굽이를 돌아 흐르는 물처럼 빠르게 흘렀다.


 벚꽃과 하루살이가 서로 사랑하면 누가 손해이며 누가 더 아플까. 하루살이의 시간과 벚꽃의 시간은 달랐다. 다른 시간을 살아가며 사랑하는 둘 중에서 남은 사람이 아프다. 죽음의 문턱에 가본 사람만이 ‘나 지금 살아있어’라고 말할 수 있고, 거기서 살아 나온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행복을 제대로 논할 수 있는 사람은 불행을 겪은 사람들이다.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가 떠나고 나면 나무는 슬프다.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고 떠난 하루살이를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떠난 하루살이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나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늘 상처를 박지만 또 기다리고 기다릴 뿐이다. 남은 자의 몫이다. 시간계는 모두에게 다르게 흐른다.


 버스에서 내려 자취촌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걸었다. 손을 잡으려 하지도 않았고 추위도 그녀 가까이 다가오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반나절 사이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지만 전혀 나를 보지 않았고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내가 하는 말을 듣고는 있었지만 그저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나에게 손을 내주지 않았다. 자취촌으로 돌아온 그날, 그녀는 선배와 마지막으로 밤을 보낸다고 했고 나에게 작별을 고했다. 작별이 선뜻 무슨 말인지, 뭐를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날 밤, 자취촌에서는 대형화재가 났고 그녀의 집에서 그녀와 선배는 깨끗하게 재가 되었다. 그녀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불행을 죽 겪다가 한 번 행복한 것이 나을까. 여태 행복하다가 한 번 불행한 것이 못할까.

 좀 견뎌보지.


 하얀 눈이 불기둥으로 떨어졌다. 눈이 내리면 모두가 다 같아진다. 아이의 머리 건, 파마머리 건, 어른이건, 교회이건, 절이건 모두를 하얗게 덮어 버린다. 눈은 죽음이다. 모두를 하얗게 만들어 버리는 눈은 죽음이다. 인간은 눈을 맞고 필멸하게 되어있다. 그렇지만 불기둥으로 내린 눈은 하얗게 덮지 못했다. 먼저 내린 눈이 아직 녹지도 않은 자취촌에서는 무서운 불길이 치솟아서 선배와 그녀는 공기의 배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완전하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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