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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Aug 30. 2022

라디오를 켜봐요 21

소설


21.


  맥주는 차가웠고 파스타는 따뜻했지만 서서히 식어갔다. 맨 인 더 미러는 라이브였다. 88년도 그래미 시상식에서 부른 노래였다. 치론이가 용케도 이런 귀한 앨범을 구했다.


 [평생의 단 한 번의 변화를 코트 깃을 세우니 마음과 영혼이 흔들려 길거리로 나온다.

 세상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변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남자는 거울 속의 남자와 함께 시작하려 한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

 거울 속의 그에게 방식을 바꿔보자고 용기를 내어 말하는 것]


  팝을 좋아하지 않던 치론이도 ‘맨 인 더 미러’를 유심히 들었다. 녀석의 눈빛은 때 아닌 계절에 여러 날 내리는 비 같았다. 어두운 하늘도 있었고 빛바랜 오늘의 안타까움도 있었다. 이제 곧 바다가 될 강물의 미미한 짭조름함도 있었고 비가 고인 물웅덩이의 혼탁함도 있었다.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없었기에 치론이는 동생을 찾으러 담임선생님과 많은 곳을 다녔다. 저녁에 녹다운이 된 권투 선수같이 와서는 저녁과 술을 같이 마시자고 했다. 나는 늘 워터 덕에 있었고 대학교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입대를 하게 되었다.


 내가 워터 덕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으면 치론이가 나타났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올 댓 재즈로 가서 맥주를 마셨다. 올 댓 재즈의 누나는 방학 내내 있었고 여전히 교포 화장을 한 채 우리를 반겼다. 쇼팽이 새끼 고양이의 발바닥처럼 부드럽게 밤을 수놓았고 생맥주는 우리의 위장을 수놓았다. 입대가 2주 남았고 치론이는 여동생을 만났다. 다행히 어딘가로 팔려갔거나 술집에서 일을 하지는 않았다. 여동생은 방학이 끝날 무렵에는 집으로 온다고 약속을 했다.


  피아노를 치는 상혁, 드럼을 연주했던 교상, 기타 리프를 끝내주게 연주했던 효상. 그리고 치론. 우리는 내가 입대하기 전에 주왕산으로 2박 3일 여행을 갔다. 효상의 삼촌이 몰던 스포티지(1세대)를 빌렸다. 운전면허증도 효상밖에 없었다. 우리는 효상이 운전을 할 줄 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효상이 운전대를 잡았고 교상이 조수석에 앉아서 창문 위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뒷좌석에는 치론이가 앉고 내가 중간에 앉고 옆에 상혁이 앉았다. 트렁크에는 텐트와 각종 식료품과 그것들 위에는 효상의 기타가,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아래위로 움직였다.


  주왕산에 진입을 할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폭우로 바뀌었다. 초행길이고 몹시 위태롭게 산길을 달렸다. 내비게이션도 없었던 시기여서 지도 하나만 달랑 들고 갔는데 차가 어딘가로 들어 갈수록 걷잡을 수 없는 미궁 속을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도로는 아스팔트를 벗어난 지 오래됐고 울퉁불퉁한 흙길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길이라고 보이는 도로는 흙탕물로 위험천만했다.


  처음에 교상이 겁을 내더니 나도 상혁이도 운전을 하던 효상도 이거 큰일이다 싶었다. 우리 이제 어쩌지 하는 걱정을 했다. 반면에 치론이만 느긋했다. 그렇게 보였다. 편안한 표정과 자세였다. 꼭 사고가, 무슨 일이 날 것만 같은 지금의 이 순간을 아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몹시 무서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치론이가 일단, 우리 여기서 밥을 먹자,라고 해서 우리는 그제야 서로 배가 무척 고프다는 걸 알았다. 차를 세웠다. 차를 세웠을 뿐인데 비가 차 천장에 떨어지는 소리가 교상이가 연주하는 드럼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어느 누구도 일어나서 움직일 생각을 못 했다. 차의 와이퍼를 꺼 버리니 비가 창문에 고스트의 얼굴을 만들어 냈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산속은 살아있는 고래 뱃속 같았다.


 차가 지나온 바닥은 돌과 흙길이 그대로 노출이 된 길이라 차의 타이어가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나)까지 견뎌낼지가 문제였다. 치론이가 몸을 뒤로 돌려 짐 꾸러미에서 무엇인가 꺼내서 밖으로 나갔다. 차 위에 비 막이를 설치하고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스포티지 옆 문 앞에 비를 피할 수 있는 큼지막한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가시나, 이거 대단한데. 너 이거 어떻게 된 거야?” 교상이가 치론이의 가슴을 만졌다. 치론이는 자신의 가슴을 내밀며 “나 이래 봬도 보이스카우트였어.”라고 말했다. 우리는 오오, 하며 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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