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 오른손에는 라디오헤드의 앨범이 들려 있었고 왼손에는 데미스 루소스의 앨범이 늘 들려있었다. 그리고 목에는 카메라를 걸고 다녔다. 라디오헤드가 나오자마자 우리는 열광했다. 스웨이드보다 더 좋은 거였다. 반면에 영국 밴드와는 다른, 데미스 루소스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있기도 했다. 그러니까 리트머스 종이에 물이 스며들듯 우리는 데미스 루소스의 목소리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우리에게 데미스 루소스 노래를 알려준 건 슈바빙의 주인 누나였다. 우리는 데미스 루소스의 ‘집시 레이디’를 많이 들었다. 슈바빙을 처음 만난 건 새 학기가 시작되는 1학년 봄날의 바닷가에서였다. 우리는 중학교에서 모두 만났고 모두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피아노 때문에 바쁜 상후를 제외하고 기타를 든 효상과 기철이와 함께 봄날의 하굣길에 효상의 기타 연주를 들을 요량으로 바닷가로 가고 있었는데 ‘SCHWABBING’이라는 간판을 본 것이다.
간판을 보자마자 기철이와 나는 서로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그대로 지하의 슈바빙으로 빨려 가듯 들어갔다. 그 뒤로 3년 동안 슈바빙은 우리의 아지트가 고스란히 되어 주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슈바빙의 주인 누나가 우리의 뮤즈가 되리라고는.
슈바빙이 오픈 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을 때라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날 들어갔을 때 들렸던 음악이 데미스 루소스의 ‘집시 레이디’였다. 그 외에도 슈바빙에는 평소 들어보지 못했던 인도 음악이나 그리스 음악이 흘러나왔고 독일어로 된 시 낭송도 흘러나왔다. 우리는 팝 이외에도 세상에는 멋지고 마음을 홀딱 빼앗길만한 음악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건 정말 멋진 경험이었고 조금은 충격이었다.
기철이와 나는 슈바빙이 독일에서 전혜린(우리는 전혜린의 글도 아주 좋아했다. 그 고독, 그 체제, 그 외로움과 감당할 수 없는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키고픈 의식의 리추얼까지 몽땅 사랑했다)이 살았던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죄다 비슷한 어감의 촌스럽지 않은 척 촌스러운 이름의 카페들보다는 ‘슈바빙’이라는 이름에 반해 그대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지하에 위치한 슈바빙은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바닥의 카펫으로 전해지는, 토마토를 밟은 것처럼 푹. 신. 거림이 신발의 바닥을 뚫고 머리까지 전해졌고 지하라서 습기를 어쩌지 못해 향을 피워 나서 향냄새가 슈바빙의 공간에 여운처럼 감돌았다. 슈바빙으로 내려가는 통로의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었고 액자로 만들어진 시와 노래 가사 같은 것들이 영어로 프린트되어 붙어 있었다. 슈바빙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상후가 없으면 자주 갈 수 없는 ‘올 댓 재즈’와는 달리 슈바빙에는 돈이 별로 들지 않았다. 슈바빙 주인 누나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화를 하면 우리가 더 노친네 같았다. 말랐는데 뒷모습은 꼭 콜라병을 보는 것 같았다. 게스나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의 청바지를 늘 입었고 티셔츠는 생로랑을 입었는데 그것이 생로랑이라는 것은 상후가 알려주었다. 우리는 그 브랜드를 몰랐었다.
입술이 도톰하고 연한 진홍색 립스틱은 어쩐지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딱 주인 누나에게 어울렸다. 그녀는 지방 사람이지만 방언을 쓰지 않았고 가끔 독일어 같은 것을 하면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슈바빙 주인 누나는 우리가 마음에 들었던지 하루 종일 있어도 눈치를 주지 않았다. 우리는 슈바빙의 주인 누나에게 슈바빙의 이야기와 이미륵의 이야기를 들었다. 주인 누나는 독일 슈바빙에서 미술을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독일에서 미술을 던져 버리고 고향으로 와서 작은 카페를 하게 되었고 카페 슈바빙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며 보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좀 더 친해지게 된 다음 들었다.
슈바빙 주인 누나에게 들은 이미륵의 이야기는 우리를 입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에 나치에 대해서 그렇게 서슴없이 말을 할 수 있다니!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미륵의 소설을 읽어보리라. 기철이는 주인 누나에게 꼭 읽어 보겠다고 했다.
그녀는 슈바빙에 아프로디테 차일드의 음악을 종종 틀었는데 그중에 ‘집시 레이디’를 많이 틀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그 노래를 많이 들었다. 아프로디테 차일드에서 건반을 치던 사람이 세기의 반젤리스이며 거기서 노래를 불렀던 사람이 데미스 루소스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우리는 데미스에 관한 일화를 주인 누나에게 듣게 되었다.
데미스 루소스가 이미 유명해져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그 비행기가 납치된 일이 있었다. 그때가 아마 85년도인가 86년도인가 그렇다. 납치범들은 비행경로를 돌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비행하기를 명령했다. 그때 납치범 중 한 명이 데미스 루소스를 알아봤다. 그 납치범은 세기의 데미스를 실제로 보고 노래도 실제로 듣고 싶었다. 데미스 루소스는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미성의 데미스 루소스의 노래가 납치된 비행기 안에 울려 퍼졌다.
“무슨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
우리는 누나에게 무었다.
“몰라 나두, 아마도 집시 레이디가 아니었을까. 그 노래였으면 좋겠어.”
누나의 목소리는 늘 고요해서 새벽 호수의 물 위로 피어나는 물안개 같았다.
데미스 루소스의 노래를 들은 납치범들은 비행기 납치를 포기하고 다시 원래의 경로로 비행기를 돌렸다는 일화를 들었다. 우리는 마치 크리스마스의 반짝이는 전구를 처음 보는 다섯 살짜리처럼 입을 벌리고 앉아서 슈바빙 누나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데미스 루소스의 집시 레이디 https://youtu.be/ATZPwPkRF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