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당일
22.
인생이란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누구에게나 평이하게 주어지는 하나의 스톱워치 같은 것이다. 일련의 난잡하고 조잡한 부조리의 나열 속에서 반복되는 과정의 귀결 같은 것이다. 흘러가는 한 해의 덧없음이나 감성에 호소하며 지나가는 막바지의 끝을 아쉬워해 본 적은 마동은 없었다. 달리는 행위로만 따지자면 겨울에는 무엇보다 계절의 탓으로 달릴 때 얼굴만 빼고 몸을 중무장하고 달려야 한다. 그것이 마동이 탐탁지 않았다. 조깅이란 무릇 가벼운 몸으로 한 시간 이상 끝없이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땀을 듬뿍 흘린다. 단지 그것인데 겨울에는 추위가 몸을 옷으로 꽁꽁 감싸 매고 달리게 만들었다. 그런 겨울을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할 수 없다. 겨울에 두껍게 입고 달리는 것이 싫어서 gym을 찾아서 운동을 한 적이 있었다. 실내라는 곳도 겨울만큼 마동과 맞지 않다는 것을 그때 알 수 있었다. 실내에서 이런저런 운동을 한다는 것이 마치 살찐 햄스터가 되어 쳇바퀴를 돌리는 것처럼 운동을 해야 했다. 비슷한 복장의 모습을 한 남자들이 비슷한 시간대에 들어와서 비슷한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비슷한 숨쉬기를 하며 비슷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운동을 하는 곳이 실내 운동장이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장면이 연상이 되었다. 전부 인상을 쓰며 말없이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누군가 피를 토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 비슷하게 죽는다. 그 공포가 점점 확산되어 간다. 사람들은 원인을 알지 못한 채 다음 날 또 한 사람이 피를 토하며 죽는다. 벌벌 떨었고 공포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헬스클럽을 삼키려 한다. 그때 누군가 한 사람이 선동을 한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반박을 하려면 여러 개의 문장과 연구결과에 입각한 사실을 가져와야 한다. 하지만 이미 반박을 준비하는 것 역시 선동에 당한 것이라는 괴벨스의 말처럼 사람들은 한 사람의 말에 자신의 마음도 믿지 못하게 된다. 서로를 의심하고 범인은 상대방이라고 서로 외치지만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은 없다. 스티븐 킹이 실내체육관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죽음을 소설로 써낸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스티븐 킹은 이런 따위의 글은 쓰지 않는다.
실제 헬스클럽이 영화 속의 모습과 다른 점은 헬스클럽에서의 운동도 지극히 혼자만의 운동이지만 클럽장이나 트레이너, 먼저 들어온 회원은 신입회원에게 친절함을 보이기 위해 관심이나 간섭을 한다. 그저 내버려 두기에는 안타깝거나 안 된다는 무언의 의무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마동에게 이런 운동은 이렇게 하는 게 좋다든가, 이 기구는 이렇게 들어야 하지, 같은 조언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그저 트랙을 달릴 수 있으면 만족했지만 의도치 않게 아령이나 근력 운동에 필요한 운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마동을 가만두지 않았다.
아마도 마동이 이렇듯 싫어하는 겨울을, 저 긴팔에 긴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는 무척 좋아하는 계절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럼에도 ‘왜’라는 의문은 꼬리표처럼 붙었다. 필시 불가결한 어떠한 무엇에 의해서 저 여자는 겨울을 단맛 가득한 딸기 무스케이크만큼 좋아하거나 더위를 타지 않는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 까지 생각하고 마동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대나무공원에서 몸을 살며시 풀면서 여자의 걸음걸이를 쳐다보고 있으니 비가 한 두 방울 우두둑하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름날의 비는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이런 레인 시즌에 내리는 비는 더욱 그러한 모습이 짙었다. 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은 곧 십여분 힘 있게 떨어지다가 인간의 모습에 놀라 달아나버리는 새떼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조깅 중에 예고도 없이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여름에 중구난방으로 내리는 비는 일기 예보관들까지 난처하게 만들었다. 특히 소나기의 경우 더 그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