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
아파트의 진입로는 이차선 도로다. 이차선 도로라지만 주정차 단속이 끊어지는 시간부터는 양쪽 도로에 차들이 스멀스멀 주차를 한다. 도로의 양 옆으로 차들이 들어서고 나면 이차선 도로에서 자동차들이 빠르게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수는 없다.
택시는 천천히 갔다.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밝아오지 않는 밤은 없다. 그렇지만 승섭이의 눈에 들어오는 택시 밖의 어둠은 도저히 밝아질 것 같지 않았다. 너무 어두워서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면 손이 어둠에 묻혀 버릴 것만 같았다.
천천히 가고 있다, 이 택시가. 택시가 사람의 걷는 속도로 간다.
이차선의 도로를 밝혀주는 가로등은 하나 건너 하나씩 켜져 있고 그마저도 희미하게 불빛을 자아내고 있었다. 건전지가 다 된 플래시 불빛처럼, 눈뜨자마자 보이는 세상처럼 가로등의 불빛은 희미했다. 이건 분명히 술 때문이다. 승섭이는 너무 많은 소주를 마셨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생각에 후회가 밀려왔다.
사내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던 여직원이 있다. 그녀는 누가 봐도 호감 가는 얼굴에 날씬하기까지 했다. 미인이었다. 정장을 입어도 다른 여직원보다 잘 어울렸다. 멋진 털을 가진 너구리처럼 그녀가 옷을 입으면 옷이 살아났다. 그녀가 들고 다니는 보테가 베네타의 손지갑은 경이롭기까지 해 보였다. 그런 그녀가 그에게 대시를 한 것이다.
그날은 팀에서 받은 오더를 다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승섭이는 그녀뿐 아니라 여자에게 도무지 성욕이라든가 이성으로 다가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일에만 더 빠져들었다.
회사는 승섭이를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그를 지켜보던 그녀는 안타까웠다. 저렇게 일만 하다가 인생이 무너져내려 퇴사를 하는 사람들을 몇몇 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승섭이에게 저녁에 시간을 내달라고 했고 회사 근처의 카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승섭이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지만 동료가 이런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라는 말에 약속을 정했다.
하지만 승섭이는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했다. 오후에 하달된 프로젝트의 변경으로 그가 하고 있던 작업도 대폭 수정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승섭이는 남아서 작업을 하다가 그 시간을 지나쳐버렸고 두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약속이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그녀는 회사에서 그와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후에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승섭이는 소문 같은 것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조직사회에서 들리는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그녀에게 사과를 했지만 사과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다시 약속을 잡겠다던가 하는 계획은 승섭이의 머릿속에는 입력되어 있지 않았다. 약속을 정하고 만나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프로젝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게 자신에게는 더욱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소주를 너무 많이 마신 탓일까.
그녀와 한 약속과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 때문에 난처하게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 지난 일이야.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고 다시 깍지를 끼고 손목을 풀었다. 택시가 전혀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승섭이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술 냄새가 날까 봐 입을 가리고 택시기사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택시기사는 도로에 무엇인가 있는 것 같은데 미세하게 움직이는 모습처럼 보여서 지나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승섭이는 택시기사에게 미터기에 찍힌 돈을 현금으로 주며 잔돈은 괜찮다고 하며 여기에서 내리겠다고 했다. 라디오의 노래는 바뀌었다. ‘고양이 나라’라는 제목의 노래라고 했다. 인디아의 말투로 고양이 나라에 대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등으로 들으며 택시에서 내렸다. 새벽의 가라앉은 공기가 그의 폐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바닥에 젖어있는 비 냄새와 움직임이 둔한 대기 속의 공기 냄새가 났다. 그리고 너무나 어두워 도로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술 때문이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