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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r 08. 2024

그녀의 도서관 17

단편소설



17.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오면서 나는 신념을 버렸다. 신념은 감옥이라고 한 니체의 말에 동감하기 때문이다. 신념이 강하면 그것대로 나를 가두고 만다. 키키에 대한 신념도 너무 강하면 곤란하다.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흔들림이 많은 가능성이 이곳에 있다. 나는 그걸 찾으면 된다. 거기에 키키가 있을 것이다. 지배당하면 안 된다. 지하주차장에는 필요한 것만 있다. 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과 주차장을 밝히는 불빛 그리고 주차된 차들.


차들이 기온이 낮은 이곳에서 나에게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내가 차들을 믿었기에 차들도 나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이 그동안 나의 신념 같은 굳건한 관념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하주차장은 따분함으로 가득한 세계지만 이처럼 평온한 세계가 없었다. 이곳이 바로 나의 세계이자 키키의 세계다. 나는 더 내려갔다. 온도 역시 조금 달라졌다. 나는 옷깃을 여몄다.


고독한 곳이다. 숨을 쉴 때마다 내 몸속에서 능소화가 입으로 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의 내부에도 능소화가 피어나기를 바라고 있을까.

그러나 나의 능소화는 나를 어딘가 잘못된 곳으로 나를 데려가려는 것이 아닐까.


나의 내부의 능소화는 오해에서 비롯되어서 피어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토록 고독한 것이다. 지하에는 몸을 대피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그렇게 몸을 말고 앉아 있으니 조금씩 기분이 풀어지면서 알 수 없는 부드러운 감촉이 나의 몸을 감싼다는 걸 알았다. 어둠이다. 나를 포근하게 감싸는 건 어둠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주차장의 불빛은 사라졌다. 온통 어둠이 세계를 나눠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무섭지 않았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기시감 때문인지 여러 기억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그럴수록 기분은 좀 나아졌다. 부드러운 어둠은 나를 여전히 감싸고 있었다. 온도가 내려간 지하지만 따뜻함을 느꼈다. 이 따뜻함은 차가운 곳에서 나오는 따뜻함이다. 처음 느끼는 이 따뜻함이 어쩐지 낯익었다. 누군가 나의 등 뒤에서 나를 안아 주어서 그 사람의 체온을 나에게 나눠 주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점점 차가워졌지만 나는 따뜻해졌다.


그 사람이 키키라는 걸 안다. 키키는 이곳에 있다. 내가 내려 옴으로 키키의 벽은 자연스럽게 허물어졌다. 나는 강한 신념에서 벗어나 심연으로 키키를 찾기 위해 몸을 던져 버렸다. 그러므로 순수한 이성이란 실은 비판받아야 마땅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칸트는 올바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키키는 어둠으로 이 대립하는 세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미세한 균열은 키키의 행동에 제제를 가했고 키키는 그만 이곳에 갇혀 버렸다. 누군가 구하러 오지 않는 한 키키는 나오지 못한다. 사람들은 지하주차장에 내려왔지만 많은 사람들은 차를 주차하기 위해서 내려왔을 뿐이다. 목적이 강하면 그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게 순수 이성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나는 자유했다. 나의 등을 안은 그 사람의 체온이 나에게 옮겨진 다음에야, 그때서야 나는 자유롭다는 것을 알았다. 더 이상의 피로감도, 더 이상의 공복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허가 물러갔다. 공허가 있던 자리에 등을 앉아준 사람이 들어왔다. 키키였다. 나는 이 안온함에서 벗어나기 싫었지만 그럼에도 몸을 돌렸다. 하지만 등 뒤에는 좀 더 짙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안으로 풍덩 하며 물에 빠지듯 들어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개를 들 핌도 없었다. 가슴이 막히는 것 같아서 숨쉬기가 어려웠는데 능소화 분말의 짙은 향을 맡으니 괜찮아졌다. 그러나 힘이 들었다. 물리적인 힘은 아니다. 사고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어둠으로 떨어진 나는 키키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오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은 만만찮았다. 그저 지상으로 올라오는 길은 없었다. 빛을 보며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계속 걸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지만 큰 빛이 보이고 나는 그 빛이 있는 곳으로 와서 쓰러지고 말았다.


도서관이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빛이 도서관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제 무엇을 생각하며 지내야 할까. 사고가 불가능하면 단순한 문장을 쓰는 건 불가능하다. 불가능이라는 형태를 생각하자 거대한 결락이 어깨를 짓눌렀다. 나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신음 속에는 기분 나쁜 불안과 불가능이 가득했다. 불안은 사실 그리 나쁜 게 아니다. 불안이 늘 따라다니기 때문에 불안이 나의 동력원이라 여기며 지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불안으로 나는 도서관처럼 투명하게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은 제자리가 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순간이 세계의 균형이 잡히는 순간이다. 휴우 숨을 토해냈다. 사서가 와서 나의 어깨를 잡았다. 손으로 위로가 느껴졌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위로가 따스해서 나는 그대로 있었다. 손은 나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이제 키키를 못 찾을 거 같아요] 그렇게 말을 하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나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러다가 손에 약간 힘을 주어 나를 당겼다. 나는 그 힘에 고개를 들어 사서를 봤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건 사서가 아니라 키키였다. 그녀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키키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녀도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 속에 하얀 치아가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돌아와서 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나도 맞은편에 누군가 앉게 되었다. 맞은편의 그녀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서가 카운터에서 통이를 데리고 우리를 보고 있었다.


도서관 폐관 전 날 우리는 불 꺼진 도서관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물을 끓여 능소화 차를 함께 마셨다. 조가 편지와 함께 보낸 것 중에는 킬키뉴어로 오는 비행기 티켓 두 장도 있었다. 12월 31일이 끝났다. 바로 다음 날 1월 1일이 시작한다. 끝났음은 시작을 알리는 스위치 같은 것이다. 나의 옆에는 그녀가 기대어 앉아 있다. 우리는 창문으로 보이는 대한해협을 보며 비행 중이다. 여전히 불안하다. 그러나 이 불안은 나의 동력원이다. 키키에 이 불안을 나눠 갖는다. 이제 키키와 함께 그녀의 도서관에서 단순한 문장을 써 내려갈 수 있다. 우리는 단순한 존재에 지나지 않으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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