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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Feb 22. 2024

그녀의 도서관 2

단편소설


2.


도서관은 믿기지 않지만 시립도서관이다. 그러나 시립도서관으로써 기능은 없다. 오래전부터 있던 거대한 시립도서관은 사람들이 찾지 않아서 그곳에 거대한 주차장이 들어서고 시립도서관은 명목만 가지고 이 건물의 2층에 소규모로 자리 잡게 되었다. 건물과 옆의 건물 사이의 공간은 뛰어넘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하지만 벽이, 벽이 뛰어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 벽이 있어서 나는 그녀에게 나의 존재를 알릴 수 없다. 그러나 벽 덕분에 나는 그녀를 매일 볼 수 있다. 벽 속에 있으면 보호받는다. 무엇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인간이 인간을 괴롭히는 가장 추악한 존재다.


인간이 태어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 하나는 나 이외의 인간을 괴롭히기 위함이다. [벽 속의 또 다른 벽]에 그런 구절이 있었다. 인간은 인간을 괴롭히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가족은 가족을 괴롭힌다. 형은 동생을, 오빠는 언니를, 아빠는 엄마를 괴롭히고 엄마는 딸을 괴롭힌다. 학교에서 친구들은 한 친구를 괴롭히고 선생님은 학생을 괴롭힌다. 교감은 선생님을 괴롭히고 교장은 학부형을 괴롭힌다. 상병은 이등병을, 애인은 애인을, 어른은 어린이를, 아이들은 성인을, 대통령은 국민을 괴롭힌다. 인간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다. 모순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모순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난다. 그 사랑은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시체의 숨결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더 이상 식을 수 없으니까. 사랑은 빨리 타오르지만 금방 식는다. 식은 사랑만큼 고통스러운 건 없다. 힘들어서 집안을 박살 낼 용기는 있어도 창밖으로 몸을 던질 용기는 없나 봐. 사랑이 깨지는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소리지. 사랑은 그래서 시체의 숨결 같아야 한다.




오늘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다. 자는 동안 땀을 흘렸다. 밤새 끙끙 앓았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고 내 앞의 침대에서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다. 여자의 입 속에 이는 하나도 없다. 여자의 몸매가 좋다. 여자는 나의 엄마였다. 엄마? 엄마가 이런 모습이었나. 나는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본다. 그런데 남자의 얼굴이 많이 보던 얼굴이다. 그럴 리 없어야 하는데 그 남자는 나였다. 눈을 뜨니 옷이 다 젖었고 몸에서 열이 났다. 사랑을 나누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사랑한다 얘야]

[싫어요, 제발 저리 가!]


옷이 이토록 축축하도록 땀을 흘리다니. 땀에 젖은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옷을 갈아입고 나는 도서관으로 출발했다. 버스를 탔는데 흠흠 하며 냄새를 맡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나는 땀을 흘리고 몸을 씻지 않고 그대로 나왔다. 나는 신경이 쓰여 내 몸의 냄새를 맡았다. 흠 흠. 벽의 냄새가 났다. 햇빛을 받지 못해 곰팡이가 피어있는 벽의 냄새다. 습한 냄새. 축축한 냄새. 짙은 냄새다.


콜록콜록, 버스가 기침을 했다. [곰팡이 냄새가 심해서 운행이 불가능합니다. 내려 주시겠습니까?] 나는 중간에 내려야 했다. 빨아 놓은 팬티가 없어서 속옷을 입지 않은 채 나왔다. 바지만 입고 다니는 기분이 묘하게도 짜릿했다. 누군가 장난이 심한 아이가 나의 바지를 휙 내린다면 나는 무척이나 당황하겠지. 창피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견딜까. 나는 견딜 수 없다. 그 짧은 시간 몰랴오는 창피함은 쓰나미와 같다.


도서관까지 걸어가려면 두 시간 정도 걸리려나. 가방을 보니 안에 시 노트가 있었다. 나는 시를 쓰고 싶었다. 노트를 꺼내서 몇 자 적으려고 했다. 시 노트를 들고 다닌 지 몇 년 째다. 그러나 시 노트에 적힌 시는 한 편도 없다. 볼펜으로 찍어 놓은 점만 한 가득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몇 글자 적었다. [내가 보고 싶은 건 어쩌면 그녀가 아니라 그녀 속의 벽이다]


나는 그녀의 벽이 보고 싶었다. 그녀의 벽은 무슨 색일까. 벽 없이는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녀의 이름이 알고 싶다. 그녀의 이름을 수진으로 하자. 나는 수진이라는 이름이 좋다. 그러나 그녀를 함부로 수진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다. 시 노트에 처음으로 글자를 기입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거 따위로 나의 기분은 좋아진다. 인간이 얼마나 간사한다. 고작 이런 걸로. 그래서 나는 고작 이런 인간이다. 이런 인간에게는 친구가 없다.


걸어와서 그런지 도서관 안이 덥다. 외투를 벗어서 의자에 걸었다. 의자에 외투를 걸어 놓고 앉아서 책을 펼치는 이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사진은 시간을 잡아 두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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