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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Feb 23. 2024

그녀의 도서관 3

단편소설


3.


늘 앉는 창가에 앉았다. 창가라고 하지만 아무도 앉지 않는 자리다. 벽이 가로막아 서 답답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벽을 보는 걸 좋아한다. 벽을 보는 재미가 있다. 벽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세계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비와 바람에 벽을 만든 벽돌 하나하나가 전부 다르다. 색채도 비슷하지만 비바람과 햇빛과 습도 때문에 다 다르다.


오늘은 도서관에 온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다. 사실 늘 별로 없다. 도서관에 사람이 많으면 내뱉는 이산화탄소가 많아서 별로지만 사람이 없으면 그것대로 불안해서 별로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도서관에 찾아와서 일부러 책을 읽을까. 세상과 거리를 두는 곳 중에 도서관은 일 순위에 있다.


나는 그녀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내쪽을 봐달라고. 이곳을 봐달라고. 그녀는 오늘도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의 속옷은 짙은 검은색이다. 검은색은 내가 좋아하는 색이다.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싶다. 그녀는 매일 말라가는 것 같다. 다시 텔레파시를 보낸다. 여기로 고개를 돌리라고. 나를 봐 달라고. 온통 집중해서 그녀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있는 힘을 다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녀는 붉은색 아니면 검은색 속옷만 입는다. 그게 마음에 든다. 붉은색은 피와 같고, 검은색은 밤과 같다.


밤의 피. 그녀의 별명은 [밤의 피]다. 


둘 다 짙음이 있다. 그녀에 비해 나는 옅다.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의 피에 대해서 시를 쓰고 싶었다. 단순하게 쓰고 싶었다. 피와 밤은 닮았다. 그녀가 거울을 보며 몸을 관찰하더니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내쪽으로 돌리려고 했다. 나의 텔레파시를 받은 것일까.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옆얼굴을 거울로 보는 것이었다. 그녀를 좋아하지만 그녀와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를 안아야겠다는 생각, 그녀의 입에 나의 페니스를 물려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그녀와 함께 그녀 속에 있는 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봤다. 하마터면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나의 얼굴이 지우개로 뭉개 놓은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거울에 그렇게 비치는 것일 뿐이겠지. 하지만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보니 나의 눈코입이 전부 뭉그러져 있었다. 손을 보니 팔과 다리에 벌레들이 잔뜩 붙어서 피부를 파먹고 있었다. 벌레들은 그녀의 벽에서 나와서 나의 피부를 갉아먹었다. 그녀는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텔레파시? 나의 엄마가 나를 똑바로 보듯이.


사서가 와서 나를 흔들었다. [쉿, 조용히 주무셔야죠]라고 사서가 말했다. 나는 얼굴을 더듬었다. 얼굴이 뭉개진 채로 죽을 수는 없다.


[무명화가에게 돈을 많이 준다고 그림을 하나 그려 달라고 했죠. 무명화가는 돈을 얼마나 주나요?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400만 원을 제시했습니다. 무명화가가 좋아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무명화가의 두 손을 묶었어요. 무명화가는 이렇게 하면 어떻게 그림을 그리냐고 하더군요. 당신의 손으로 그린 그림은 형편없어요. 다른 것으로 그려봐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라고 사서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모른다. 하지만 정말 궁금했다. [그래서요?] 나는 사서에게 물었다. [이제 잠이 확 달아났죠?] 라며 사서는 자신의 자리로 갔다. 손은 너무 많은 일을 한다. 손은 발이 되기도 하고 눈이 되기도 한다. 손은 칼과 총 없이도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손은 그래서 너무나 많은 일을 한다. 사서가 한 이야기의 마지막이 궁금했다.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녀는 뭘 먹었을까. 그녀는 날씬하다. 그런데 매일 조금씩 더 날씬해졌다. 말라간다. 마른다는 건 좋은 게 아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그런 비애감은 처음 보는 것이다.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초월한 비애감이었다. 그런 슬픔이었다. 그녀에게서 나오는 슬픈 감정은 무엇일까. 그녀 속, 그녀의 벽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녀의 벽이 그녀를 슬픔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녀는 왜 벽에서 나오려 하지 않을까. 아니다 그녀는 나오려고 하지만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무엇에 의해서 말이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보이는 비애감은 그런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내가 그녀를 벽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자꾸 말라가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거울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보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진화의 시간만큼 길지는 않다. 단지 몇 분 정도다. 그녀는 뭘 좋아할까. 이가 없으니 씹어 먹는 건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현재에 만족하는 건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야] 조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지름길을 택하겠다. 그녀를 이렇게라도 보는 게 나는 좋다. 하지만 그녀가 말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조의 말이 맞는다는 걸 알았다. 그녀를 만나야겠다. 그녀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렇게 바라만 보는 건 변태나 하는 젓이다. 그녀도 분명 자신의 벽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걸 알 수 있다. 뒷모습이 그걸 말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벽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하고 있다. 매일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은 책과 비슷했다. 책은 이 도서관과 비슷했다. 이 도서관을 내가 찾아왔듯이 그녀도 내가 찾아주기를 바랄 것이다. 나는 그걸 안다. 이 세상에 내가 아는 건 많지 않지만 그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좀 더 긴 시간을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몸을 봤다. 그리고 옷을 입고 방을 나갔다. 지금 나가면 그녀를 따라갈 수 있다. 매일 이 시간에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스토커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나의 행동을 가로막았다. 언제나 행동 앞에 이성이 가로막고 검열을 한다. 이성이라는 게 나의 모든 행동을 제재하는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은 그리 좋은 건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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