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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Feb 25. 2024

그녀의 도서관 5

단편소설


5.


이 도서관의 조도는 책을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눈이 편하고 책을 보는 사람들 역시 몹시 편안 얼굴을 한 채 책을 읽고 있다. 그렇게 많은 책은 아니지만 어지간한 책은 다 있다. 내가 원하는 책은 적어도 전부 있다. [벽 속의 또 다른 벽]이 그렇고 [세계기후와 꿀벌 숫자의 관계]와 [명왕성이 태양계에서 빠진 건 너 때문이야]도 있다. 다음에 읽을 책들이다. 전부 800페이지가 넘는다. 길고 빽빽한 활자가 가득한 두꺼운 책이다. 나는 그런 책을 선호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좋다. 언제 끝나는지도 모른 채 읽다 보면 두꺼운 책이 끝나가는 것도 좋다.


어느 나라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자국의 시설을 파괴하는 것 중에 동물원이 있다고 한다. 동물원을 파괴하지 않으면 전쟁 중에 굶주린 동물들이 밖으로 나와서 사나워질지 모른다고 했다. 동물원 안의 동물들, 육식동물들은 사육당하다가 먹이가 떨어지고 굶주리게 되면 극도로 포악해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동족포식도 하게 되다가 인간이 보이면 달려들어 팔을 물어뜯고 눈 안으로 송곳니를 찔러 넣어 짓이겨 놓는다. 집에서 키우는 개 역시 주인이 없고 내몰리게 되면 변한다.


굶주리는 것에 장사는 없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건 인간이다. 인간이 굶주리게 되면 육식 동물 그 이상으로 흉포해진다. 나는 안다. 인간이 가장 무섭다는 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지만 그것 역시 겁이 난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살아가는 것 또한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은 사람을 제일 무섭게 하는 존재다. 직장상사를 잘못 만나면 그렇다. 지옥문이 열리는 것이다. 지옥이란 불바다가 펼쳐지는 곳이 아니다. 인간들이 많은 곳에서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곳이 지옥이다.


조가 찾아왔다.

조는 단 하나뿐인 친구다.

우리는 많은 소주를 마셨다.

가끔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조는 여러 직업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안보이더니 2년 있다가 나타나서 도서관에 있는 나를 찾아왔었다. 내가 그 도서관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말이다. 그때 조는 수염이 얼굴을 전부 덮고 있었고 몸에서 너구리 냄새가 났다. 마르지도 찌지도 않은 것을 보니 먹는 건 다녔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늘 가는 단골집은 [태전술집]라는 선술집이다. 술집이지만 식당 같은 곳이다. 안주는 그날그날 다르고 이름 모를 안주는 대체로 맛있었다.


주인장은 80살이 다 된 늙은이로 예전부터 80살이 다 된 것 같은데 여전히 그 모습이다.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인데 몇 년째 비슷한 모습이다. 꼬장꼬장한 것 같은데 음식 솜씨 하나는 꽤 좋았다. 사실 음식이라고 해봐야 우리가 좋아하는 안주는 고구마를 말린 것이다. 말린 고구마는 어디에도 다 어울린다. 그저 고구마를 말린 것뿐인데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맛이 난다.


우리는 도수가 강한 소주를 데워서 마셨다. 때마침 겨울이고 우리는 강한 소주를 데워서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먹다 보면 동치미가 나오고, 작은 어묵탕도 나왔다. 어묵탕은 흔히 보는 어묵탕은 아니다. 으깬 생선살에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갈아서 동그랗게 반죽을 하고, 무를 얇게 썰어서 멸치 우린 물에 넣어서 같이 끓이면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아서 국물이 맑고 시원했다. 무엇보다 어묵이 상당히 맛있었다. 그저 덤으로 주는 안주가 이토록 맛있었다.


동치미 역시 직접 담가서 장독에서 꺼내서 그 맛이 한결 깊었다. 주인장 이름은 형건 할아범이다. 하지만 할아범이라는 말을 했다가는 한 손에 들려 쫓겨나고 만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늙은인데 힘은 장사다. 전부 의문투성이 사람이다. 뜨거운 소주는 몸속으로 들어가서 그 존재를 확인시켰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털의 부드러움을 알아? 그게 마치 지나가는 계절과 비슷해]라고 조가 말했다. 조는 진지하다. 항상 진지하다. 심각하지 않다. 그런 조가 마음에 든다. 이런 친구가 있어서 나는 좋다. 우리는 고구마 껍질을 테이블 위에 쌓아 가면서 뜨거운 소주를 목으로 넘겼다. 속이 타오른다고 느끼면 동치미로 그 타오름을 재웠다. 조는 술에 취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조는 자신의 등에 능소화가 피어나는 것에 대해서 말했다.


[능소화가 피부를 뚫고 올라올 때가 있는데 그때 능소화를 꺾어 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됐어]라고 조가 말했다. 나 또한 도서관에서 보는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의 이야기를 들었다. 능소화는 신비로운 색을 지니고 있다. 조는 자신의 등에 피어난 아름다운 능소화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능소화를 꺾어서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조는 그 사람과 능소화를 팔아서 그 돈으로 지금까지 지냈다고 했다. 조의 등에서 피어난 능소화는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되었다.


하지만 조는 여기에 온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그대로 테이블 위에 뻗고 말았다. 형건 할아범은 조를 들춰 업어서 방에서 재웠다. [며칠 전에 왔더라고. 와서는 밤에서 꼼짝 않고 나오지 않았지]라고 형건 할아범이 말했다. 술 때문인지 말소리가 뭉개져서 들렸다. 조는 형건 할아범의 아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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