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교관 Feb 26. 2024

그녀의 도서관 6

단편소설


6.


그녀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나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던 스케치북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 안에는 연필로 스케치가 되어 있었다. 그림은 온통 사람의 배를 가리고 그 안에서 내장을 꺼내거나 흘러내리는 그림이었다. 마치 무슨 의식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잔인하게 그렸지만 전혀 잔인하게 보이지 않았다. 키스 헤링의 고어 버전 같았다. 그녀는 그림을 잘 보라고 했다. 사람의 배 속에서 떨어지는 건 내장이 아니라 벽이었다.


벽.


그녀의 속을 채우고 있는 벽. 그녀는 나에게 그 벽에서 꺼내 달라고 했다. 벽에서 그녀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이가 하나도 없어서 나에게 말을 하는데 무리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말소리를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벽에서 그녀를 꺼내야 한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렇게 매일 밤 땀을 흘리다간 몸에서 수분이 전부 빠져나가 버릴 것 같았다. 물을 찾았지만 물이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일어나서 편의점으로 갔다. 하루의 시작이다.


얼굴에 실금이 작년보다 더 그어져 있었다. 오늘은 바람이 너무 분다. 비가 바람에 실려 창문에 부딪혔다. [문을 좀 열어주세요]라고 하는 것 같다. 꼭 그녀가 바람과 함께 날아다니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창문 하나 열지 못하고 있다. 어제보다 빛이 없어진 오늘, 빛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빛의 무게를 느끼는 일은 아주 가혹하다. 비는 나를 비난하듯이 내렸다. 도서관으로 가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그녀를 보려면 오직 도서관에 가야 하는데.


그러나 땀을 많이 흘리며 잔 탓인지 몸에 힘이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편의점을 다녀오면서 알게 되었다. 10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을 40분 만에 다녀왔다. 비가 나를 비난하듯 쏟아졌고 나는 다리에 힘이 없어 몇 번이나 우산을 든 채 쉬어야 했다. 완벽한 비다. 


완벽한 문장, 완벽한 절망, 완벽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지만 비는 완벽했다. 그래서 비가 무서웠다. [완벽한 건 시간 같은 거거든] 조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시간은 완벽해서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든다. 나는 완벽한 빗속을 빌리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가는 길은 유난히 험난하지만 그녀를 보기 위해서 도서관으로 갔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하며 살아내고 있다.


도서관은 오늘 임시휴일이었다. 물이 새는 것에 대한 공사를 한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한참 도서관 앞에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조에게 연락을 했다. 형건 할아범이 조는 이른 오전에 나갔다고 했다. 우산을 쓰고 좀 걸었다. 비가 계속 와서 버스를 타고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곳까지 갔다. 그 근처에는 고등학교와 중학교가 모여 있어서 책방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책방에 앉아서 책을 읽곤 했다. 그때는 케이시 퀘문네드의 소설을 읽었다. 몇 권을 읽으면서 작가가 ‘그’였는 줄 알았는데 ‘그녀’였다. 강렬하고 거침없는 문체에, 잔인한 장면 묘사가 탁월해서 남성으로만 알았다. 우리나라에 왔을 때 나는 거기까지 가서 사인을 받아 오기도 했다. 그녀는 소설가라고 하지 않으면 영국 시골의 한 집에서 뜨개질이나 할 것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외모와는 달리 소설 속에서 그녀는 과격할 때와 공격적이 될 때가 있었다. 불온한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때의 문체는 숭어처럼 살아서 팔딱팔딱거렸다. 가방에 그녀의 책 다섯 권을 넣어가서 전부 사인을 받았다. 그녀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짓더니 나에게 선물로 얇은 책을 한 권 주었다. 그녀의 나라에서만 출간한 작은 에세이 집이었다. 영어도 아니고 난생처음 보는 언어였다.


그 후로 나는 조금씩 글을 적기 시작했다. 글이란 가장 예민한 부분을 제일 예쁘게 덮을 수 있는 장치다. 시작은 고등학교 근처의 책방이었을 것이다. 책방 주인은 늘 돋보기 같은 걸 쓰고 있었다. 돋보기로 보는 세상에 매료되어서인지 하루 종일 그렇게 앉아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주인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가면 주인대신 손님들을 응대하기도 했다. 주인은 마녀사냥에 관한 책을 좋아했다. 1300년대 프랑스에서 마녀사냥이 이루어진 후 현재까지 그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때는 마녀로 몰리면 불에 타서 그냥 죽고 말았지만 현재는 마녀로 몰리는 순간 거의 죽은 것처럼 지내야 한다. 외롭게, 고독하고 또 고독하게.


조는 나에게 부탁한다며 강아지 한 마리를 안겨 주었다. 아직 다 자란 강아지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강아지였다. 쓰다듬으니 손가락 사이로 쓸리는 감촉이 좋았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쓰다듬으니 강아지는 졸음에 겨워 기분 좋은 듯 보였다. 나의 품에 안겨 졸기 직전의 강아지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조는 또 술에 취했다. 조는 술에 취하면 말이 많아진다. 조는 내가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는 걸 알고 많은 이야기를 한다. 조는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등에서 능소화가 피어나지 못한다. 능소화를 피워서 돈을 벌어오겠다고 했다. 말을 많이 할수록 능소화에게 혈액을 공급할 수 있다.


 [오늘 밤이 마지막이야]라고 조는 말했다. 조는 나에게 돈뭉치를 건넸다. 얼추 500만 원은 돼 보였다. [그 녀석 키우려면 돈이 많이 들 거야] 라며 조는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조는 확실한 계획을 말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여자를 찾으러 가는 것일 게다. [강아지는 어디서 났어?] 나는 조에게 물었다. [하늘에서 내려왔어]라고 조는 말했다. 조는 술을 많이 마셨다. 뜨거운 소주가 우리의 몸을 잠식했다. 그렇게 조와 뜨거운 소주를 혈관에 부으며 마지막 밤을 보냈다.


도서관에 가는데 통이(강아지 이름이다. 배를 두드리니 통통 거려서 그렇게 지었다)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통이를 데리고 도서관에 갈 수도 없다. 통이는 나를 주인으로 알고 꼬리가 떨어져라 마냥 흔들며 유순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버스에서도 쫓겨날 것이다. 하지만 나의 걱정은 기우였다. 버스기사도, 버스에 탄 사람들도 아무도 통이를 데리고 타는 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다. 누군가는 통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고, 누군가는 헤헤 거리는 통이의 눈을 마주 보며 인사를 건넸다. 통이도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매력이 있나 보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의 도서관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