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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r 03. 2024

그녀의 도서관 12

단편소설


12.


[키키를 남자들은 좋아했어요. 모든 남자들이 그랬죠. 그건 키키의 얼굴이나 몸매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어요. 키키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무엇이 있어요. 아주 짙은 그 무엇이 저를 비롯해서 사람들을 키키의 속으로 잡아당겼어요]라고 미호는 말했다. 키키는 이가 없어서 말을 잘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더 묘한 매력을 발산했다. 나는 버드와이즈가 있냐고 물었다. 미호는 버드와이즈를 한 병 가지고 왔다.


[그래서 키키가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없군요]라고 나는 말했다.


[네, 적어도 여기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겉으로는 키키와 가까이 지냈지만 어쩌면 키키와 거리를 두려고 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키키와 함께 있으면 걔에게 흡수되어 버릴 것 같았거든요. 저는 사실 그렇게라도 누군가에게 흡수되길 바라면서도 그게 겁이 났던 것 같아요. 흡수되고 나서 지금처럼 키키가 떠나버리면 저는 아마 다시는 빛을 보지 않으려고 할 거거든요]


미호는 맞은편에서 나와 맥주를 마셨다. 미노그바는 매음굴 같은 바였다. 맥주를 마시고 위스키를 마시는 곳이지만 기이한 분위기가 구석으로 갈수록 가득한 곳이었다. 바의 벽면 한 편에 그림 두 점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미노그바와 어울리는 것 같았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커플 인 배드라는 그림이에요. 키키가 걸어 놓았어요. 키키는 이 그림을 무척 좋아했어요. 열심히 그림을 그린 가난한 미술가가 사랑하는 이를 끌어안고 이불속에서 곤히 잠드는 이야기라며 키키는 시간이 나면 이 그림을 계속 봤어요]라고 미호가 말했다. 그림은 볼수록 이불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가난한 화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붓을 들고 물감의 진한 냄새를 사랑하는 사람의 짙은 냄새로 덮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진한 냄새는 짙은 냄새로 덮는다. 단순하지만 깊이가 있다. 모든 인간이 소멸한 후에도 짙은 냄새는 남아 있을 것이다. 1월의 오후 해가 떨어지기 직전에 세상에 그려놓은 일몰의 색처럼 마지막까지 짙음은 남아 있다.


[키키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싶어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모르는 게 아니라 무엇을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라고 미호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나는 그런 미호를 위로했다. 괜찮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괜찮아,라고 하는 것뿐이었다.



[아주 가난한 자가 자수성가하며 부자가 되었다면 그 사람은 자신과 비슷했던 가난한 자들을 도와줄까.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지. 자신의 모습이 보여서 더 싫어하는 거야. 세상은 비정한 곳이거든. 부자가 되었지만 가난한 자들을 더 심하게 부리고 하대하고 업신여기는 거야. 그래야 자신의 가난한 시절에 받았던 고통을 되돌려 준다고 믿는 거야. 그래서 그 누구도 믿으면 안 돼]라는 조의 말을 떠올렸다. 왜 갑자기 조의 말이 떠올랐을까. 조는 늘 마지막에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도?라고 했는 조는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믿을 사람이 조 밖에 없다. 조가 있었다면 키키에 대해서 물어볼 텐데.


커플 인 베드 옆에는 또 다른 그림이 걸려 있었다. 꽃 그림이었다. 초현실 그림이라 무슨 꽃인지 알 수 없었다. [이건 능소화래요. 능소화 같지 않은데 추상적으로 그린 능소화 그림]라고 미호가 말했다. 더더욱 조가 필요한 밤이었다.




그날 밤 나는 화가가 되어 이불속에서 키키를 끌어안는 꿈을 꾸었다. 그녀와 이불속에서 키스를 나누었다. 키키는 나에게 잇몸을 맡겼다. 혀로 그녀의 잇몸을 건드려 보라고 했다. 이가 하나도 없는 키키의 잇몸은 그야말로 세계였다. 말랑한 잇몸이 혀로 느껴졌다. 키키는 잇몸을 건드리자 소리를 냈다. 키키의 속옷을 벗기고 키키의 세계로 들어갔다. 키키의 세계에는 사랑이 존재했다. 키키의 세계 속 사랑은 단순한 주황색이었다. 내가 원하는 사랑이었다. 사랑이 눈에 보였다. 사랑은 언제나 모호하고, 사랑이라고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사랑은 흩어지기 마련이지만 키키라는 세계의 사랑은 단순하고 짙었다. 짙은 주황색. 아름다웠다. 이토록 짙은 사랑은 비애감까지 들었다.


키키는 자세를 바꾸어서 머리가 아래쪽으로 가도록 누웠다. 잇몸이 느껴졌다. 그때 잇몸에서 이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치아가 아니라 능소화였다. 키키의 잇몸에 능소화가 주렁주렁 열렸다. 나는 능소화를 혀로 건드렸다. 키키는 소리를 냈다. 사랑의 소리다. 조의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순간 창피했다. 조는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나와 키키의 사랑을 보고 있다. 키키는 더욱 혀와 잇몸을 움직였다. 나의 눈이 조의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방출과 동시에 힘이 빠졌다. 눈을 뜨니 반항기 청소년이 방출해 놓은 것만큼 많은 양이 속옷에 있었다. 그리고 짙은 냄새가 방에 가득 퍼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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