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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관 Mar 02. 2024

그녀의 도서관 11

단편소설


11.


[달팽이의 느림과 지렁이의 느림이 우리의 눈에는 비슷하게 보여도 엄연히 그들의 느림은 다르다]라고 사서는 말했다. 나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정치인이 만든 당은 하나의 시스템이야. 정치지인은 변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지만 당이라는 시스템은 계속 존속하는 거야. 정치지인들을 아무리 욕을 해봐야 시스템을 파괴하지 않는 한 바뀌는 게 없어]라고 사서는 또 말했다. 그러나 도서관은 파괴되려 한다. 어떤 무엇인가에 의해서. 세상에 같은 건 없고, 절대 하는 것도 지속되지 않는다. 사서의 말에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도서관에 대해서 단순한 문장으로 만들고 그 문장을 이어가자. 될 수 있으면 손으로 쥘 수 있는 연필로 문장을 만들어 가자. 나는 연필을 손에 쥐고 시 노트에 문장을 여러 번 썼다 지웠다. 그리고 한 문장을 완성했다. 단순한 문장.


[도서관은 숨을 쉰다] 곧이어 또 한 문장을 완성했다.


[도서관의 심장이 뛰고 있다] 이 두 문장을 엮었다.


[도서관은 숨을 쉬고, 심장이 뛴다] 그러자 도서관은 방금 전보다 좀 더 짙어졌다. 살아있는 것이다. 숨을 쉬는 모든 건 살아있다. 살아있는 건 심장이 뛴다. 심장은 한 번 뛰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심장이 멎는다는 건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끔찍한 일은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에게 한 번 딱 일어난다. 그런 끔찍한 일은 한 번 일어나면 더 이상 일어날 필요가 없다.


12월 31일이 끝나면 곧바로 1월 1일의 시작이다. 나의 사랑이 끝남과 동시에 너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삶이 끝난다는 건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일과는 다르다. 달팽이의 느림과 지렁이의 느림은 다르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도서관이 숨을 쉬는 건 내가 숨을 쉬는 것과 다르다. 그녀가 숨을 쉬는 건 도서관이 숨을 쉬는 것과 비슷하다.


조는 한 번에 보내면 되는 편지를 한두 페이지씩 써서 매일 보내는 것 같다. 도착하는 편지가 있고 오지 않는 편지도 있는 것 같다. 편지가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어떤 편지는 이어지지만 어떤 편지는 하늘에서 떨어진 거북이 같다. 아주 친근한 편지가 있는가 하면 생소하고 엉뚱한 편지도 있다. 어떤 편지지에는 조가 지내는 수녀원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형편없는 그림이었다. 얼핏 보면 수녀원이라기보다 마구간처럼 보였다. 누군가 이건 수녀원이야 라고 해봤자 역시 마구간처럼 보였다.


나는 [미노그바]에서 그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거기에 없었다.

 [걔는 더 이상 여기에 나오지 않아요. 남자친구인가요?]라고 거기에서 일하는 여성이 묻더니 [걔한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에요. 걔는 남자에게 인기는 많았지만 걔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어]라고 말했다. 나는 남자친구가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하지 못했다.

[걔는 우리가 하기 싫어하는 일도 척척 해냈어요. 우리는 그 일을 하지 않았어요. 돈은 많이 벌지 몰라도 너무 위험했거든요. 걔가 우리 대신 그 일을 했는데 우리에게 빚을 갚을 기회도 주지 않고 사라져 버렸어요] 라며 훌쩍였다.


나는 바에 앉아서 맥주를 주문했다. 나는 그녀에 관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라고 나는 물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여성은 [전 미호라고 해요. 본명은 아니에요. 여기서는 누구도 본명을 말하지 않아요. 그냥 미호라고 불러도 되고요. 호칭은 생략하고 불러도 돼요. 우리는 걔를 여기서는 키키라고 불렀어요. 걔는 마녀배달부 키키를 좋아했거든요]라고 미호라는 여성이 말했다. [키키]라고 나는 한 번 말해 보았다.


[키키 걔는 우리와 비슷했지만 우리와 달랐어요. 키키의 행방은 모르지만 짐작은 가요. 키키는 아마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관념이 가득한 곳으로 갔을 거예요. 키키는 그런 곳에서 어디까지 견디는지 궁금하다고 말했거든요]라고 미호가 말했다. 미호 씨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미호가 그러기를 바랐다. 키키의 본명은 알지 못한다고 했다. 미호는 미노그바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보다 키키와 친하게 지냈지만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했다. 키키는 마법을 부려 모든 대립이 격렬한 곳을 정화시킬 수 있는 여자라고 미호는 말했다.

 

[키키 걔는 어떤 날에는 혼돈 그 자체 같았어요. 하지만 또 어떤 날은 평범 그 자체처럼 보였어요. 너무나 평범해서 미노그바에서 일하는 애가 맞나 싶을 정도였거든요]라고 미호가 말했다. 키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조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평범함이 보이는 날이 있었다. 그녀의 가냘픈 몸매는 평범할 수 없지만 어째서 평범이 묻어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럴 때 키키는 평소보다 거울을 많이 들여다보았다. 마치 거울에게 주문을 거는 것처럼. 하지만 평소에 보는 키키의 속옷을 입은 모습은 평범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인류의 모든 생활을 분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함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다른 말로 혼돈일지도 모른다. 키키는 혼돈을 가지고 있는 흔치 않은 여자 중 한 사람일 것이다. 비현실적으로 평범한 사람에 속하는 여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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